활명개신의 인문학을 싹트게 한 200년 전의 청주여성

지난 3월 3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리운 청주인 - 사주당 이씨'를 주제로 한 좌담회가 열렸다.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태교신기’ 등을 펴낸 여성학자 사주당 이씨를 ‘그리운 청주인’ 시리즈의 네 번째 인물로 선정하고, 지난 3월 3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녀의 삶과 학문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박용만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문희순 문학박사가 함께 한 좌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지금부터 200년 전에 청주에서 출생했고, 그 후에 경기도 용인으로 출가해서 그 당시의 시대적?상황적 요청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그 시대를 넘어서 200년 후의 오늘과 내일에도, 그 뜻과 얼이 생명가치의 각성과 그것의 세대간?남녀간 상생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원동력으로서의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력을 싹트게 했던 이 고장 출신의 여성실학자 한 분이 용인에서는 대대적으로 현장되고 있는데 비해 청주에서는 거의 망각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현상을 시정하기 위함과 동시에 청주와 용인을 매개하는 지방간 상생의 범례로서의 의미도 크기 때문에 이번에는 청주에서 여러분과 함께 그녀의 삶과 사람됨과 사상을 그리고, 기리려는 충정에서 오늘의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지금까지 충북과 청주에서는 사주당 이씨의 존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사주당 이씨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서는 여러 기념사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정작 사주당 이씨가 태어난 청주에서는 묘소나 후손이 없는 탓인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소장을 맡고 있던 충북학연구소에서 지역의 인물을 발굴하던 중 사주당 이씨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청주에서 태어나 25살에 용인으로 시집을 간 사주당의 학문이나 인격 형성은 거의 청주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들을 통해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고향인 청주에 대해 갖고 있던 남다른 애정을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임산부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태교신기(胎敎新記)’의 저자가 바로 사주당 이씨입니다. 저는 평소에 태교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이 책의 저자가 사주당이라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주당의 고향이 청주라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주당 이씨의 존재가 지역의 차원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단순히 사주당이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미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현재적, 미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인물을 다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3년도에 사주당을 충북역사인물로 선정하고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울림’이라는 공연패와 연대해 당시 청주에서 태교 축제를 2박 3일 일정으로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태교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시도를 했습니다. 태교의 근본은 ‘생명사랑’입니다. 태중에서부터 올바른 인격을 형성하자는 취지로 사주당 이씨를 징검다리로 삼았던 것이죠. 원래 계획은 태교축제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려 했는데 당시 사주당 이씨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탓인지 관심도가 낮았습니다. 그 이후 별다른 사업이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16 문체부에서 주관하는 충청권 유교문화권을 개발하려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청주시의 사업으로 태교랜드를 제안했습니다. 사주당을 기념하고 매개로 해서요. 이것이 대표적인 충청권의 유교문화 개발사업으로 선정됐습니다. 250억 원 정도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사업을 청주시가 의지를 갖고 추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주당의 지역사적 가치가 무엇이고 더 나아가 사주당이라는 인물이 한국사의 관점에서, 그리고 세계사적인 전망에서 어떤 존재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동양포럼에서 사주당 이씨를 다루는 것은 지역의 입장에서도 큰 의미가 있고 생각됩니다. 사주당 이씨를 다루는 데 있어 몇 가지 핵심적인 이슈가 있습니다. 사주당이 살았던 1800년 전후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주당이 남성의 벽을 뛰어넘어 당당한 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점. 그러면서도 시대가 부여한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시대적인 논리와 주체적인 논리를 충돌 없이 아주 조화롭게 수행하며 주체성 있는 자신의 삶을 펼쳐갔는데 이 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과연 사주당이 이렇게 남성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시대적,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짚어봤으면 합니다. 그다음 사주당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인데요. 당시의 25살 여성이 46살의 남성과 결혼을 합니다. 그것도 네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데요. 무엇이 이러한 결혼이 가능하게 했는지 규명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주당에게 고향 청주는 어떤 곳이었는지 그런 장소성의 문제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사주당의 글을 보면 항상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편지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사주당의 사상이 규명 됐으면 합니다. 사상이 먼저 규명돼야만 여성이 남성의 벽을 뛰어넘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이나 조건에 대한 답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답이 구해지면 현대 여성이 가져야 할 사상, 배경에 대한 시사점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주당은 양명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습니다. 도심과 인심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면서 인간의 욕망도 인간의 순수성과 일치시켜 봤기 때문에 인간다움과 성인다움을 넘나들 수 있는 철학적 논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주당이 살았던 1800년 전후는 인물성 동이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입니다. 철학의 화두였던 인물성 동이논쟁을 사주당과 연결하면 그녀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논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주자학자들이 인성과 물성을 다른 것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사주당은 인성과 물성을 같은 차원으로 봤습니다. 다른 것으로 분리해서 본다면, 특히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연결하여 본다면, 남성과 여성도 차등 있게 다른 성을 가진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남성중심사회를 인정하는 철학적 논리가 됩니다. 반면에 인성과 물성을 같은 차원에서 본다면 이 문제를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연결할 때 남성과 여성도 결국 본성은 같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논리를 폈을 때 남성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철학적 논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희순 박사 “여성들이 혼인 이후 살아가는 모습을 존중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렸을 때 기억들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선후배가 없고 동료가 없고, 사회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관의 전부가 친정에서 생성된 것입니다. 시댁에 들어가 자녀를 낳고 살아가지만 정체성이나 자아존중감은 어렸을 적 소녀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으로 형성됩니다. 상대 가문에 갔을 때 더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주당의 고향인 청주가 갖는 지역성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여성연구는 대체로 문인사에 집중돼 있습니다. 여성의 삶을 알아낼 수 있는 자료가 묘비명, 행장에 기록된 한 줄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대체로 문집이 남아있는 여성들의 연구에 치중되고 있습니다. 그 문인사에 많은 부분은 기녀인데요. 그들이 남성들과 많은 문학적 소통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주당, 윤지당이나 정일당 같은 사람들은 철학사에서도 철학자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여성 중에서도 그나마 연구가 진일보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주당은 실학자 같습니다. 단순한 이론을 떠나서 직접 몸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삶속에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이론을 넘어서서 실천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태교신기’입니다. 이런 분들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그 시대가 추구하던 최고의 경지를 이뤄낸 여인들로 보입니다. 전국 규모에서 볼 때 충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기 때문에 충북은 이미 이 영역을 선점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윤지당은 현재 원주의 여성인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사주당은 혼인해서 간 곳인 용인의 여성인물로 조명 받고 있습니다. 사실상 충북의 여성인물들을 타 지역에 빼앗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의 학문적인, 실천성의 원류는 바로 충북 청주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들의 학문의 모태가 되는 충북 청주에서 이 세 여성들을 비교 연구한다면 전국규모의 연구과제를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성이 큰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것들과 연계해 연구한다면 충청 기호유학을 남성만이 이어 받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남성중심으로 연구가 됐는데, 이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잘 된다면 이 지역은 이미 양성평등의 문화를 일구고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용만 연구원 “18~19세기 걸쳐 가부장 중심의 사회 속에서 여성 지식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이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집중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주당은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25세에 46살 먹은 유한규의 넷째부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결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집안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주당의 집안은 태종 이방원의 아들 경녕군의 후손으로, 사실 왕족입니다. 그러나 경녕군 이후 가세가 굉장히 기울어 고조부인 이첨배의 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을 벗어나 청주 지동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첨배는 한산이씨 이덕사의 사위입니다. 이덕사의 사촌형은 이덕수인데 이들은 현재 주성대학이 있는 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덕사의 첫 번째 사위는 우암 송시열입니다. 고조부인 이첨배는 우암 송시열과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지요. 한산이씨 이덕사 집안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이었는데 몇 대에 걸쳐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을 사위로 들였다는 것은 결국 이첨배가 왕족이었기 때문입니다. 17~18세기 무렵의 청주의 학문적 지형도의 중요한 부분은 주성에 위치하고 있던 한산이씨, 지동 쪽의 전주이씨가 사돈을 맺음으로써 연결이 됐습니다. 이러한 가문적인 배경을 가진 사주당이 왜 21 살 차이나는 남자의 네 번째 부인으로서 용인으로 시집을 갔을까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가문적인 배경도 다릅니다. 이쪽은 철저히 주자학적인 노론 쪽이었고 그쪽은 소론 쪽이었는데 왜 이러한 혼인을 했는지 사실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 한 가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기록에 의하면 가세가 기울어 굉장히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혼기도 놓치고 집안도 넉넉지 못하니 용인으로 시집을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물성 동이론이나 양명학과 연결 짓기는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사주당은 철저한 주자학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양명학자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2015년 진단학회에서 아들 유희가 주자학자라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나왔습니다. 아버지 쪽 집안은 양명학 계열인데 아들이 주자학을 신봉하게 된 것은 결국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남당 한원진이 사실 충청 호론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국 사주당의 학문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확실한 답을 찾기에는 자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사주당은 죽을 때 세 가지를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친정어머니에게 받은 편지는 항상 고향 청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굉장히 컸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손수 베껴 쓴 율곡의 격몽요결입니다. 세 번째가 성리에 대해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진주이씨 문중에서는 사주당의 무덤을 발굴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부장품이라고 하는 것이 사주당 이씨의 성품이나 학문을 한 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후대 사람들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발굴하는 일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김 주간 “저는 그 동안 ‘그리운 청주인’ 시리즈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청주의 얼을 새밝힘하는 데에 힘써왔습니다.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청주의 얼은 ‘개신’(開新=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엶)이며 그것은 역사적으로 14세기의 ‘직지’(直指=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의 무심개신(無心開新)으로, 그리고 19세기의 ‘태교신기’(胎敎新記:사주당 이씨의 아들에 의해서 1801년에 간행)의 활명개신(活命開新)으로 각각 뜻매김하고, 두가지 개신으로부터 새로운 개신개래(開新開來)의 인문학이 창발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여는 데 가장 큰 장애요인은 문벌이나 가문 또는 신분 같은 것들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입니다. 여자는 시집을 가서 시댁의 가풍과 관례에 따라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과거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며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남자들이 과거의 이력이나 현재의 자리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서 여성들은 생명과 생활을 중시하는 가운데에서 미래를 여는 쪽으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성장과정을 책임지고 아이와 함께, 그리고 남편이나 가족과 함께, 미래를 열어간다는 뜻에서 미래공창의 주역은 당연히 여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사주당 이씨의 경우는 사상으로나 삶의 방식으로나 과거의 주희(朱熹 1130~1200 : 남송의 대유학자·송학의 대성자·주자학의 원조)가 정립해 놓은 학문과 사고에 집착하는 당대의 성리학자=남성 선비들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정통 성리학의 고착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시대의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과 문화의 차원·지평·세계를 여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고장의 선철들을 찾아내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렇게 해오는 동안에 사주당 이씨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삶과 생각과 행적을 추체험 하는 가운데서 기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우리 고장의 선인들이 남겨주신 사상적·철학적·문화적인 유산들을 제대로 새밝힘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력을 출발·진작·공진시킴으로써 지방간·세대간·남녀간 상통·상화·상생의 인문학을 여기 청주에서 창발케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 나름의 인문학 지도를 새로 그리고 판과 틀을 새로 짜는데서 시작됩니다. 그 첫단계로 우리나라를 세 개의 지방권으로 나누고 영남권은 활리(活理)이화(理化)의 인문학, 전라권은 지기(至氣)기화(氣化)의 인문학, 충청권(충청남북도,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대표하는 학문적 경향)은 활명실화(活命實化)의 인문학으로 각각 지방적 특성을 차이화 하는 동시에 상호간 교류효과를 최적화 하는데서 인문학 발전의 원동력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선 영남권은 퇴계 이황으로, 호남권은 수운 최제우로, 그리고 충청권은 명재 윤증과 사주당 이씨로 대표하게 하고, 거기서 부터 더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연구를 확충해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겠습니까? 우리 나름의 인문학적 전통을 재조명한 사람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도교대 명예교수사 있습니다. 연세대에 와서 공부를 했던 오가와 교수는 한국의 철학은 ‘실심’에 기초한 실학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가와 교수는 실심실학의 연원을 천안 출신의 담헌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홍대용의 문헌에서 실제로 ‘실심’, ‘실학’, ‘실지’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홍대용이 한국 실심실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서강대의 정인재교수가 홍대용보다 앞서서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실심실학을 시발시켰다는 주장을 했는데, 오가와 교수가 열심히 조사해 보고나서 정제두의 제자들이 스승을 진정한 실심실학자였다고 현창했던 사실은 있으나, 정제두 자신이 실심실학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자각도 없었으므로 실심실학의 창시자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여러 모로 살펴본 결과 명재 윤증(尹拯 1629~1711)이 정제두의 선배이면서 스스로 실심(實心) 실학(實學) 무실(務實) 실덕(實德) 실효(實效) 등의 핵심 키워드를 그 자신의 저술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했고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실심실학의 창발자로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주당 이씨가 윤증에 못지않은 실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갈고 닦은 학문을 일상생활에서 몸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우주관이나 인생관, 가치관의 근본은 시집가기 전 본가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사주당을 ‘청주의 사주당’으로 기리기 위해서는 우선 실심무실의 실학자 윤증과 함께 장래세대의 생명을 소중하게 키우는 일을 남편과 아내의 공동과제로 여기고 함께 미래를 여는 데 진력한 활명개신의 여성실학자 사주당 이씨를 한국 실학의 공동 창시자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남 논산의 윤증과 충북 청주의 사주당을 아우를 때 논산과 청주가 동시에 시대를 앞서는 지방간·세대간·남녀간 상화·상생·공복(共福=함께하는 진정한 행복)의 새로운 인문학적 창발의 본거지로서의 위상 확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태서 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에 담긴 활명개신의 실학정신=인문정신을 경기도 용인시와 충북 청주시가 각각 독자적으로 현창함으로써 지방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거기에 상호보완적인 연대를 형성하면 또 하나의 지방간·세대간·남녀간 활명개신의 인문학적 발전기지로서의 자리매김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박사 “제가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바로 ‘생활인’입니다. 여성들에게는 오늘 아침 · 점심 · 저녁에 무엇을 먹고, 오늘 남편과 아이에게 무엇을 입힐까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이 가장 중요하고, 오늘만 있을 뿐, 그 이전과 이후도 없는 것이지요. 제가 연구해온 여성들 대부분도 이처럼 ‘하루’가 전부인 삶을 살았습니다. ‘실학’이라는 거대담론도 중요하겠지만 여성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바로 실학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초점을 맞춘다면 조선시대 여성들은 모두 실학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들이 거대담론을 바깥에서 형성한다면 여성들을 그것을 지켜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늘 하루’가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 하루의 삶이 바로 여성들의 ‘실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만 저는 지방간 상생과 세대간 상생, 그리고 남녀간 상생의 인문학을 진작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아우르는 미래공창의 인문학을 구상 ? 추진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인의 기본과제이고 특히 청주 ? 충청의 당면과제라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지방간 상생의 인문학은 학문에 있어서의 서울중심과 지방종속이라는 잘못된 관행을 타파 시정하기 위해서, 세대간 상생의 인문학은 너무나 현재세대 중심적이며 현재세대 이기주의적인 학문경향을 개혁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녀간 상생의 인문학은 낡고 시대착오적인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발상과 태도와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학자들의 공리공론에서 맴돌다 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지고, 인간과 세계의 질적 향상?발전?변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될 때, 거기서 비로소 참뜻이 찾아지는 참배움=실학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것을 함께 자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들을 남성적 사고만으로 가늠하지 말고 여성적 사고의 특징을 중시하자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불가능하고 여성에게만 가능한 것 가운데 전형적인 것이 ‘임신’입니다. 여자만이 새로운 생명을 품고 안고 키울 수 있습니다. 바로 미래를 키우는 것이죠. 여자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호생지덕(好生之德’=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실천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호생지덕’을 일상생활을 통해 신체 감각적으로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주당 이씨입니다. 사주당 이씨야말로 고장과 나라와 겨레의 미래를 생명존중을 중심축으로 남녀가 함께 늘 새롭게 열어가는데 있어서 주체적 역할의 시범사례로 보려는 것입니다.”

▷김 연구원 “인문학을 재정립하기 위해 인문학지도를 다시 그리하자는 말씀을 듣고 솔직히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실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이 처음에 문제제기를 한 것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여성들이 충청 출신인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지역의 학문이 배경이 됐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7세기, 18세기 주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성이 기반이 돼 이러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현대적인 시사점을 찾는다면 결국 지역 특성을 살리는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실심철학’의 재정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최근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며 한 모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인물성 동이논쟁만 해도 이분법적 도그마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남인에 대표적인 실학자임에도 인물성 동론이 아닌 주자학자들처럼 동이론으로 봤습니다. 윤지당의 오라버니이자 조선시대 6대 성리학자인 임성주는 초기에 인물성 동론이었다가 이후 이론으로 바뀝니다. 기호 유학자들은 인물성 이론에 빠져있었고 나머지는 인물성 동론에 빠져있다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구결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죠. 성리학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성학십도도 사실 이론적인 것은 두 개밖에 없고 나머지는 실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성리학 자체도 실학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실학이 뿌리 내렸던 곳 중 하나가 충청이고, 이러한 기호유학 토대 위해서 사주당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그리고 주로 나라밖에서 철학대화운동을 전개해오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이제부터는 나라 안팎에서 동시진행하려 할 때, 새삼 다시 생각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대한 세력 앞에서 작은 힘밖에 없는 개인이나 집단이 살아날 수 있으려면 우선 ‘이화(異化)’의 단계를 밟을 필요가 있습니다. 동화(同化)되어버리면 나름대로의 존재자체?생존자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화가 아닌 이화의 단계를 거쳐서 동화나 통합이 아닌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접화군생이라는 말은 고운 최치원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 뜻을 새밝힘해서 한 나라와 한 겨레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잘 살려보자는 것입니다. 접화군생에 대한 저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은 나와 남이 제대로 만나서 서로의 몸과 마음과 얼이 한껏 상통 ? 상화 ? 상보하면 강열한 상생 에너지가 촉발되어 모두가 새로운 차원 ? 지평 ? 세계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대립 ? 갈등 ? 시비 ? 모순 ? 분쟁은 당사자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내폐성(內閉性=안으로 갇혀 있음)에서 벗어나서 과감하게 자타 상통·상생·공복의 길로 한 발작씩 앞으로 나서는 용기·각오·모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어휘로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에 또는 누군가에 의하여 식민지화·영토화된 영혼이 거기부터 야멸차게 박차고 나와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영혼과 영혼이 제대로 아울리는 대화·공동·개신이야말로 21세기의 새로운 과제로서 우리 앞에서 우리의 선택과 각오와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나라꼴을 바꾸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의 외침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제 고집만 부리고 젊은 세대의 상황인식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꼰데’라고 규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나라꼴을 바꾸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방향을 영남권의 이화(理化=도덕적 실천이성=양심의 각성을 통한 변화)와 호남권의 기화(氣化=근원적 생명력의 활성화를 통한 변화)와 충청권의 실화(實化=일상적 생활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실천화를 통한 변화)를 함께 더불어 서로 아우르는 미래공창의 인문학으로 정리 대응 진척해 나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문학 지도를 새로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돌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문제제기를 해야 찬반논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한발 더 나아간 현실개혁의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이를 기반으로 다음세대들이 연구·실천·축적을 통해서 새로운 철학·사상·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철학·사상·문화가 오랫동안 중국이 아니면 일본이나 서양에 의한 식민지화·영토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깊은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지적인 수준보다 더 깊은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함께 열기 위해서 -미래 공창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해 두겠습니다.”

▷문 박사 “논의되고 있는 화두를 제 나름으로 정리하면 생명, 미래, 여성으로 압축되는 것 같습니다. 사주당 이씨 한 분으로 청주의 철학적 특성을 뜻매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래도 생명, 미래, 여성으로 청주발 실심철학의 중심축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18~19세기에 종법제가 정착되면서 경색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여성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입니다. 여자들을 억압하고 제도적으로 압박했지만 여성 문인들은 오히려 이때 흐드러졌습니다. 제도나 삶이 억압하더라도 우주의 기운들에 의해 함께 가는 것이지 어느 누구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시기 남성들이 흐드러지듯이 여성들도 함께 흐드러졌던 것이죠. 저절로 상생으로 간 것입니다. 남성들이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암 선생도 뜻 있고 재주 있고 공부하길 원하는 여성들은 가르쳤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이름도 없었고, 글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박 연구원 “지난해 장서각에서 한글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그 때 18세기 여성들의 글이 많이 나왔습니다. 결국 18세기 여성들이 대거 학술이나 문화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한글 때문입니다. 음성언어만 하다 문자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여성들의 지적능력이 급속도록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시기 여성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했던 것도 이것이 대거 축적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주당 이씨는 자각했던 것입니다. 여자라고 해서 바느질하고 길쌈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을 스스로 깨달아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이룬 학문의 경지가 남성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 바로 사주당 이씨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청주에서 이뤄진 일들인데 이를 어떻게 지역의 특성으로 자리매김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가 논의돼야 합니다.”

▷유성종 동양포럼위원장 “무덤에 넣어달라고 했던 세 가지 중 ‘격몽요결’이 있었다고 해서 이내 이율곡 선생의 학문적인 계파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격몽요결을 그냥 어린이 교육을 하는 교본으로 존중한 것뿐이지, 율곡 선생의 학문적인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은 사주당의 본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항상 태교를 생각하셨던 분이니 아이를 키우는 것 역시 성심을 다해 임하셨을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어떤 틀에 맞춰서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사주당의 태교문제, 후의 자녀 교육문제 등 온전히 순수하게 생활에 근접한 그것으로 해석하면 사주당을 더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연구원 “저도 처음에 이 세 가지 부장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이 격몽요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세 가지 부장물에 대해 의미부여를 할 때 격몽요결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당시 아이들의 교육서로 격몽요결과 동몽선습, 소학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손수 베낀 격몽요결을 넣어달라고 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참’이라는 글자를 ‘실’, ‘성’, ‘진’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10여 년 전부터 고민해 온 것이 참 진자입니다. ‘진’이라는 의미가 작가들마다 시대마다 범위가 다릅니다. 결국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가 이해한 시각은 참 진자가 나오든 참 신자가 나오든 조선후기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이 전 시대의 것에 대한 반발을 할 때 이 말을 썼습니다. 결국 주자가 내세웠던 학문이 정현의 고주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주자의 실학도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 주간 “사주당 이씨가 당시의 시대적인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영혼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극단적 남존여비의 사회 풍토 속에서 영혼마저 식민지화·영토화되어 버렸다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해낸 것입니다. 사주당 이씨는 가정의 안팎에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기여가 가능한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었던 것입니다.”

▷박 연구원 “사주당의 아들 유희의 글을 읽으면 사주당 이씨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치열하다는 느낌보다는 온화한 느낌이 듭니다. 형편에 따라 흘러가되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바로 ‘현명하다’라는 표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도리를 다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허난설헌처럼 여자로서의 자괴감 없이 참 현명하게 살았다고 여겨집니다. 이를 확대한다면 청주 여성상이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위원장 “18~19세기에 여성들이 갑자기 부각이 됐다는 것은 당시 실학의 한 주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실학적인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도 깨우쳤고 그것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문 박사 “한글이 창제되고 여성들이 말로만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문자로 자기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글창제가 민간에 정착되면서 여성도 자신의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 활동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압박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 오히려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의 문화가 흐드러졌을 때 여성의 문화도 함께 흐드러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남성들의 어린 시절 교육은 결국 여성들이 담당하기도 했지요. 사주당이 어머니 편지를 묻어달라고 한 것은 유씨 가문에 시집와 자녀를 길러내고 현모양처로 살았지만 자신의 원천이었던 어머니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저승까지 가지고 가고, 마지막은 이씨로 살고 싶었던 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주당 이씨는 몸소 학문을 실천한 여성실학의 선두주자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연구원 “저는 문화에 상층과 기층의 문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층은 정신문화예술처럼 관념적인 것을 말하고 기층은 상대적으로 가시적인 문화를 말합니다. 유형문화재는 소멸됐다고 해도 복원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정신문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지만 한번 없어지면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청주가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하느냐, 사주당 이씨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상층의 문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가시적인 문화를 어떻게 계승하고 전파하느냐가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체를 집어낼 수 없기 때문이죠.”

▷김 주간 “저는 지역간 상생과 세대간 상생과 남녀간 상생의 인문학을 아우름으로써 미래공창의 인문학으로 우리 나름의 인문학을 다듬어 여러분과 함께 기르고 키우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동양포럼을 시작했습니다. 청주와 논산 그리고 청주와 용인이라는 두겹의 지방간 상생을 도모하고 현재세대와 장래세대의 다차원적인 연대를 확실하게 다지면서 남녀가 함께·더불어·서로 미래공창에 동참하는 인문학적 영위가 사주당 이씨의 학문과 행적을 새밝힘하는 과정을 통해서 체험·체득·체인된 귀중한 깨달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사주당 이씨를 활명개신(活命開新=근원적 생명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미래를 엶)의 실학(=인문학)을 개신(새밝힘)한 분으로 그리고 기릴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는데, 여러분의 고견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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