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교 <충북시조문학회장>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가지쯤 특별하게 아끼는 대상이 있으리라. 두 권의 시조집을 내고 나름 시조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에게도 유난히 애착이 가는 작품 서너 편이 있다. 그 중에서 필자가 살고 있는 생거진천 연곡리 보탑사를 배경으로 한 ‘연서’라는 작품이 있는데 ‘연곡리 백비’라는 부제가 붙여져 있다. 국내 최대의 3층 목탑이 연꽃의 꽃술마냥 고즈넉하게 서 있는 보탑사 외곽에 보물 404호로 지정된 연곡리 백비가 바로 이 시조의 동기다.

“연서 연곡리 백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석비를 세웠으리라 / 구구절절 애틋한 그 말 피멍들도록 새기다가 / 끝끝내 하얗게 지우고 침묵으로 섰으리라//가끔 아내가 내게 보이는 사랑을 원 할 때면 / 들어 보인 연꽃을 향해 미소 짓던 가섭처럼 / 말없이 손을 이끌어 가슴에 얹어 주리라”

이 시조는 전형적인 사랑시다. 당시의 시작(詩作) 노트를 보면 “대부분의 석비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연곡리 백비에는 글자가 없다. 문득 ‘백지로 보낸 편지’라는 유행가가 생각났다. 사랑하는 이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 차라리 백지로 보낸다는 노랫말처럼 어쩌면 이 석비는 우리들에게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선문답을 건네는지도 모르겠다.

시인도 전에 아내가 보이는 사랑을 원했을 때 아내의 손을 이끌어 내 가슴에 얹고는 말없이 웃어 보이자, 아내는 어리둥절해 했었다. 그래서 들려준 얘기는 부처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제자 중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는 이심전심의 고사성어로, 숱한 그 어떤 말들보다 내 가슴속에 가득한 사랑을 전해 주려는 의도였었다. 어쩌면 연곡리 백비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 투명한 가슴팍을 내밀어 무한정 소통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많은 얘기를 담고 있는 보탑사는 전각 처마에 매달린 풍경마저도 계절마다 다른 울림으로 찾는 이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지형이 연꽃을 닮았다하여 보련마을로 불리는 이곳에 위치한 보탑사를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찾는 이들이 많다. 사찰의 규모도 규모지만 경내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이라 그런지 야생화를 가꾸는 손길 하나에도 여인들의 섬세함이 경내 가득 묻어난다.

이러한 보탑사 천왕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투명한 편지지가 펼쳐진다.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마음을 비우라지만 슬그머니 솟아나는 세속의 욕심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 출간한 필자의 두 번째 시조집이 ‘하심下心’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인다는 불가의 말씀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 많은 의미를 던진다. 편지라는 형태를 빌어 모두 4부로 나눠져 있는데 가까운 가족을 비롯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바람으로 엮었는데 이 모두가 시조집 제목의 동기가 되었다.

뎅그렁 풍경소리의 긴 여운이 편지지 가득 채워지면 외려 심신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게 된다. 천왕문 안팎에는 발신인과 수신인의 아무런 구분 없는 어우러진 세상이 사시사철 펼쳐있다. 그곳에 가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우표로 쓰는 보탑사가 백지로 보내는 편지를 받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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