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나기황 시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6월 이맘때면 불현듯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6.25한국전쟁 흑백사진 한 컷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느 야산 자락, 풀 섶에서 몸을 숨기고 마른침을 삼키며 스스로 상처를 동여매고 있는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 민간단체에서 공모하는 민족통일문예대전의 작품심사를 할 때면 가슴이 뜨끔거릴 정도로 아팠던 기억이 불현 듯 되살아 날 때가 있다. 출품된 작품은 주로 학생들 작품인데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잘도 풀어내는 어린학생들의 수준에 놀라기도 하고, 6.25전쟁발발 67주년이라는 피로감이 통일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껴지게 할 때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내게는 6월이 애틋한 추억속의 ‘유월(流月)’로 자리 잡고 있다. 6월이 되면 공적인 기념일이 주는 중압감을 떨치고 한 발 비켜서서 나만의 유월을 추억하고 싶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마이크로버스가 멈춰서면, 미루나무 늘어선 시오리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서 고향집을 찾던 유년시절이 다가온다. 멀리 언덕배기에서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실루엣이 어른거리면 괜스레 눈물이 났던, 맘만큼 빨라지지 않는 발걸음이 원망스러웠던‘ 그 아련한 추억의 길을 따라가면 여름방학 내내 허기 진 낮잠사이로 흰 뭉게구름이 떠가고, 매미소리 바스러지던 푸른 바람의 6월이 더 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감히 이산가족의 아픔이나 6.25전쟁의 의미를 이에 덧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6월은 어떻게 추억해도 아픈 세월이 찐득하니 녹아있는 달이라, 6월에 대한 기억 하나하나가 때로는 천근무게로 몰려오고, 비록 문예작품이지만 아물지 않은 생채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 했던가. 사람은 대다수 과거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현상을 가지고 있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은 민족의 한이 가슴 한 편에 쇠말뚝처럼 박혀있어 세월로도 어쩔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아있다. 6월 6일 현충일을 시작으로, 6.10민주화항쟁은 30년을 이어오며 핏자국이 선명한 흰 붕대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6.15일 남북공동선언’은 극한 대립상태에 있던 남북관계가 링거를 맞고 잠시 화해무드로 돌아서는 듯싶다가 그 뿐. 6.25야 더 말해 무엇 하랴. 남북이 갈린 채 휴전인지, 종전인지도 모를 만큼 긴 세월을 건너왔다.

1987년 오늘은, 군사정부의 민주화 탄압에 맞선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로 이른바 6.29 선언을 이끌어 낸 날이다. 어느 하나 뜨거운 가슴과 목숨까지 마다 한 의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상훈(傷勳)이다. 독일의 시인, 안톤 슈나크는 무겁고 얼룩 진 6월을 때로는 먼발치서 비켜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권유한다. ‘6월에는 스스로 잊도록 하자’라는 제목의 시다. ‘시냇가에 앉아보자 /될 수 있으면 너도밤나무 숲 가까이 /앉아 보도록 하자 //한 쪽 귀로는 여행길 떠나는/시냇물 소리에 귀 기울이고/다른 쪽 귀로는 나무 우듬지의 잎사귀 /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리고는 모든 걸 잊도록 해보자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자만심 /결국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사랑과 죽음조차도 //포도주의 첫 한 모금을 마시기 전에 /사랑스런 여름 구름 시냇물 숲과 언덕을 돌아보며 /우리들의 건강을 축복하며 건배하자.’ 6월이 가고 있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월드컵 첫 승을 따냈다. 기적의 시작이었고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끝을 만끽했다. 무겁고 아픈 6월을 각자의 시선으로 비켜서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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