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물론이지. 예술(작품)은 아름다워야지 그럼 무엇이 아름다운가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잠시만 다른 생각을 해보자. 이 질문은 지난 달 중순에 치러진 프랑스의 대학입시(바칼로레아, Bac)중 경제사회계열의 철학문제였다. 매년 프랑스 사람들은 대학입시 철학문제로 논쟁을 즐긴다고 하니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대신 우리도 한번 토론해보세. 일단 아름다워야 한다는 쪽에 비중을 두고 논의를 한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이른바 진선미 중에서 미 는 아름다울 미인데 이 아름다움은 단순히 보기에 좋은 것만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못할 것 같고, 보기에 좋다는 것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모두 다 적용되고 해당되는, 그리고 백년 전에도 이백년 후에도 적용될 이른바 보편적인 원리일까. 전통적인 입장에서 황금률은 물론 시각적인 효과를 가미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흔히 예술 같다던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불멸한 가치인가. 아니 아름다움은 영원불멸의, 이른바 진리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러한 논리라면 디자인도 순수 예술의 영역에 해당할 수 있고 아울러 시대나 장소에 따라서 다른 즉 문화적 다양성 혹은 예술적 창의성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즉 보편적인 적용 원칙으로서 하나 혹은 몇 개의 원리가 언제 어디서나 적용이 된다고 하면 시대적 특수성과 장소적 고유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르스테스(Procrustes)라는 산적이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납치한 여행자를 침대위에 누이고 행한 처벌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잘라 죽이고 모자라면 신체를 늘려서 죽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따라가 보면 마르셀 뒤상이 1917년에 미술대전에 출품한 파운틴(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변기로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이 이전 인상파 작가들로 부터도 논의를 할 수도, 한참을 더 우리 곁으로 와서 개념미술이나 바깥 미술, 파퓰러아트 등도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성대학의 홍명섭교수같은 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디자인이며 예술은 이와는 다르게 특정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한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은 이 이전의 순수예술이 행했던 많은 기능과 의미들을 대신 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상업화되고 대량 생산화 된 그리고 거의 동일한 행태로 소비되는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줄지는 모르지만 불편함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또한 우리들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이나 고민을 던져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도 캔버스 앞에 앉아서 아름다운 정물화를 그리고 있는 수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은 예술가가 아니란 말인가. 거참 무엇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지경에 도달해버렸다. 인상파가 나온 후에도 이 이전의 회화적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작곡되고 연주된 이후에도 여전히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바흐나 하이든과 같은 형태의 작곡을 하는 사람도 연주단체 예컨대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등등도 있기는 하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가 아니라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서 창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창작이라면 남들이 하는 것을 답습하면서 예술가라고 창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학위 논문에서 표절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여전히 예술적 활동을 하는 분들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이 떠올라 할 말이 없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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