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마른 무심천에 밤새 샘을 파시더니...

조철호 시인, 동양일보 회장

선생님-.

7월2일, 짧은 일정의 일본 돗토리현 문화탐사를 마친 60여명과 청주로 돌아오는 길엔 오랜 가뭄을 적시는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습니다. 

며칠간을 비웠던 사무실에 올라와 채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오세탁 선생님이 방금 운명하셨답니다” 문화부 기자의 짧은 전화 전갈을 받았습니다. 오후 4시였습니다. 옆에 있던 편집국장은 “피곤하시겠지만, 아무래도 조사를 써 주셔야겠습니다” 반은 사정이고 반은 지시(?)였습니다. 

월요일자 마감시간이 불과 서너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시간, 누구에게 조사를 청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2010년 2월, ‘동양인터뷰-조철호가 만난 사람’에 ‘척박한 시대 향토문화 터 닦기...문화운동 반세기’란 제목으로 8순을 맞으신 선생님을 모시고 전면 2면의 대형 인터뷰기사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터여서 머뭇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헤아려보니 선생님이 1930년 5월16일생이시니까 올 해가 꼭 미수(米壽-88세)셨네요. 고향은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셨지만 태어나신 곳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이셨지요. 서울 중앙고보-서울대 법대를 나오셨고 단국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지요. 일본 교토대 연구교수와 청주여중·고와 청주고 교사-충북대 교수 등 후학을 가르치셨지요. 그런 사이에 충북도 법무관이며 사회과장이며 민주공화당 조직부장 등 정당생활도 하셨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경력은 1957년 1월 충북문화인협회(현 충북예총의 전신)를 발족시키고 1962년 2월 충북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이 땅에 문화와 문학예술의 텃밭을 일구신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보약을 잘못 먹어 청각을 잃은 후 줄곧 보청기를 사용해야했음에도 남의 말을 잘 들어준 지역의 어른으로 살아 오셨음을 우리 후배들은 잘 보아 왔지요.

저와는 시를 쓰는 선후배로, 충북문인협회장 선후배로, 충북예총회장 선후배로 남 다른 인연을 맺고 있으나 최근 몇 년을 외부와 연을 끊고 계셨음은 아마도 치매라는 그 자존심 상하는 병 치례를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였음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젊은 시절 척박한 향토문화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셨던 그 노고가 이제 각종 꽃들이 어우러지는 화단이 된 것을 기뻐하고 계신지요. 아니면, 많은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감탄을 하기엔 아직 미흡한 것이 많아 아직도 아쉬운 마음 닫지 못한 채 눈만 감으신 것인지요.

선생님-

이제 이승의 마음 거두시고 24년 전 저 세상으로 먼저 가 몽매에 그리던 큰 아드님(석창. 55년생)을 만나시겠네요. 그리고 곱고 예쁜 부인(김정애 여사.84)과 따님 성미(61) 정선(58), 작은 아들 석용(54)씨 등 가족들의 근황을 들려주시겠네요.

부디 이승에서 청춘을 다 바치시고 생애를 불살라 이루신 그 많은 업적을 세세히 반추하시면서 복된 새 삶을 누리시길 삼가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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