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신기원 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조선시대 쿠데타를 통하여 왕위에 오른 군주는 세조, 인조, 중종을 들 수 있다. 세조는 쿠데타를 통하여 직접 왕위에 오른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실질적으로 권력의 1인자에 오르자 위기감을 느낀 단종이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으로 밀려난 것은 선양이 아닌 왕위 찬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쿠데타를 통해서 왕위에 오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세조의 경우 정통성시비에 시달려서 그런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과 자주 술자리를 갖고 소통을 하였다. 그러다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추거나 즉석에서 게임을 하는 등 격의 없이 지냈다. 이와 같이 한 이유는 술자리를 통해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희석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양날의 검으로 인식하고 술자리를 통해 그들의 기분도 풀어주고 동지의식을 확인하여 충성을 다짐하게 함으로써 공신들의 칼끝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술자리를 통해 벼락 승진을 하거나 술자리에서의 실수로 참형을 당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조참의로 있던 어효첨은 술에 크게 취해도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하여 이조판서로 임명되는 행운을 누렸으나 변방근무로 불만이 쌓였던 양정은은 술자리에서 왕의 퇴위를 언급하여 결국 참형에 처해졌다. 세조는 임종 직전에 원상제를 만들어 술자리를 함께 했던 공신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였는데 이들은 예종과 성종시대를 거치면서 훈구파로 자리를 잡게 된다.

조선시대 독재정치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공신들은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중종이다. 하지만 그는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 아니다보니 초반에 공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자시절 혼인했던 부인도 연산군의 처조카라는 이유로 폐위되었고 회의석상에서도 공신들이 일어난 후에 중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재위 8년 즈음 반정 3인방이 사망하면서 왕권을 다져나갔다. 이때 조선시대 가장 개혁적인 인물인 조광조를 만나면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정치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정책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그의 인기가 올라가자 기득권세력인 훈구파는 반발을 확산시키고 조직화하였다. 중종 역시 국정개혁에는 동의했지만 왕권을 점차 제한하려는 조광조의 신권강화주장을 부담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중종과 조광조는 위험한 동반자가 되었다. 결국 중종은 기묘사화를 통해 조광조와 결별하고 왕권을 지켜나갔다.

페모살제와 중립외교에 대한 비판을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친병을 거느리고 직접 참여하였다. 아버지와 형이 광해군정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권세가들에게서 뺏은 토지는 반정공신들에게 다시 불하되어 공신들만 배를 불리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시대를 한탄하는 상시가가 유행하였다. 더구나 현실을 외면한 외교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본인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결국은 적장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후 8년간 인질생활을 하고 귀국한 아들인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자유롭지 못하고 저항하는 며느리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조선시대 쿠데타는 역성혁명이었다. 왕이 부덕하여 민심을 잃으면 덕이 있는 다른 사람이 천명을 받아 왕조를 바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을 제외하고는 부덕하여 민심이 다했다고 평하기가 곤란하다. 또한 중종처럼 명분에 의해 왕위에 올랐어도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가 낙제점일 경우 역성혁명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한편 세조처럼 패륜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어도 왕조의 기틀을 만드는데 공헌했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최악은 인조와 같은 경우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쿠데타에 참여했으나 국난을 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대에 맞게 반복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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