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이현수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서점을 찾을 때면 신간 서적의 범람 속에 으레 선택 장애를 겪게 된다. 대게는 신문 서평이 나 지인의 추천, 저자의 명성에 기대기 일쑤지만 제목의 때깔과 목차가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선택지에 놓인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이 모두에 속한다. 한평생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냉철하게 분석한 그녀의 사상가로서의 명성만큼이나 책 제목도 심오했다. 구구절절 철학의 유구한 변천사를 가르치려 들며 사유를 강요하는 고지식한 책들과는 사뭇 달랐다. 격동의 세상살이 속에서 사유의 미학을 일깨우기엔 더없이 좋은 ‘인간의 조건’은 형이상학적 전통을 넘어서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실천적 방향을 제시한다. 질문이 없는 시대를 살며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곁에 두고 조근 조근 읽어 내려가기엔 이 여름, 제격이다.

 

미셀 푸코의 명저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에서 푸코는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온 장소로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의 필연적 산물이 정신병원이라고 분석한다. 나아가 감옥은 범죄자들의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의 사회통제를 위한 전략의 소산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화된 시대를 살기에 선뜻 감옥까지는 아니어도 정신병원의 경우, 체제가 자행하는 비이성에 대한 유배의 정당화일 수 있겠다 싶다. 언급한 두 권의 책들은 공통분모가 있다. 이성과 비이성의 잣대가 보편적 인식의 오류일 수 있으며 획일화된 이성을 위한 편향된 이데올로기 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청년들 사이에 '관태기'라는 신조어가 자주 쓰인다. 관계 권태기의 줄임말이다. 사회 속에서 진중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것이다. 관계의 대상이 어른들일 경우에는 더하다. 이런 것이다. 복장이 너무 튀지 않니?, 머리는 왜 그리 요란스럽니, 먹는 게 왜 그 모양이니, 그 직업으로 먹고살겠니?, 사실 이런 꼰대질 적인 사적 영역, 침범의 질문들은 인권 침해일 수도 있다. 일제의 ‘교육칙어’를 여과 없이 가져온 ‘국민교육헌장’의 시대를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았던 우리에게 전체보다 개인을 인정해주는 태도가 아직 미숙하다는 방증이다. 한국 사회가 진정한 공동체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연결을 전제로 한 개인주의가 성숙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저해하는 나쁜 성향이라는 편견부터 걷어내야 한다.

 

푸코의 지적처럼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잣대에서는 개인주의는 언제나 뭇매를 맞는다. 그러나 정작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학연, 지연을 토대로 한 연고주의와 ‘침묵의 카르텔’이다. ‘게임의 룰’과 공정성을 저해하는 극단적 집단 이기주의의 현상들이다. 이런 적폐를 극복하거나 타파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견을 소신껏 피력할 수 있는 개인주의가 존엄화되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개인이라는 주체는 보편적으로 연계된 곳에서 발전적 개인주의로 존재할 수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불의 앞에 개인의 침묵은 방조이자 방관이다.

 

물론 자신의 인격을 담금질할 사회적 환경을 전제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사회 공동체의 안정성을 함몰시킨다. ‘혼술족’과 ‘혼밥족’이 모나지 않을 일상이 된 사회는 소외된 구조 속에서의 도피된 개인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포용적 고용과 온전한 관계의 실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 요체인 다양성은 무릇 개인주의에 바탕 한다. 개인의 존엄과 선택을 용인해주는 사회는 독점 사회를 제어하는 효율적 테제이다. 지난 세기는 사회공동체의 이익적 몰두를 끈질기게 고집해왔다. 획일화된 정답을 강요하고 은근슬쩍 갑을 관계가 되어가는 조직 내 타인과의 삭막한 관계에서 개인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한 공동체의 독소였다, 그러나 순위 지향적 문화가 음습하고 소수의 위너와 언저리로 내몰린 다수의 루저를 끝도 없이 생산해내는 사회구조는 서글픈 일이다.

 

‘모두를 위해서’라는 개량된 전체주의의 서늘한 이면에 소외된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제대로 된 사회를 위한 관계의 연결은 개인주의의 담대한 인정이다. 그럴 때만이 고립된 개인은 연결의 문을 연다. 고용에서 소외된 청년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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