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사람들이 서력기원 1789년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자유주의의 주춧돌을 놓은 ‘프랑스대혁명’ 때문이다. 문화사라는 드라마에서 시민혁명의 시작으로 장면화 된 이 사건은 클라이막스라는 위치를 아직도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내면적 의지는 바스티유 성문을 강제로 여는 것을 시작으로 역사에 그 연출을 맡겼다. 자유가 핏 빛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 거대한 폭풍의 해에 이름 없는 27세의 한 청년이 마르세이유 천문대에 문지기로 취직되었다는 사실이 오버랩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장-루이 퐁즈가 사람들의 인식범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가길 기다려야 했다. 1801년 7월 11일 자기 생애 첫 혜성을 발견할 때까지 불과 두 해 남짓의 기간 동안 그는 마르세이유 천문대의 문지기에서 관측기사로 신분을 변모시켜 나갔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누계가 과학분야에서 무려 22명을 선포했다. 노벨상의 계절이 오면 일본은 수상의 흥분으로, 우리나라는 왜 우리는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는가,' 라는 사실에 대한 흥분으로 휩싸인다. 이에 대한 분석이 매체마다 이루어지고 공중파는 개탄과 함께 대안제시로 풍부해진다. 대부분의 현실분석은 국가의 과학분야에 대한 투자와 장기인재양성계획의 부재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이 그리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대책에 대한 개념이 학문의 본질과 먼 거리에서 관찰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는 격(格)의 형태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그 모습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좋고 나쁘다는 개념을 판단의 기준점으로 사고(思考)의 장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근본개념의 타당성을 ‘방향성의 오류’에 편승시켜서도 안 된다. 우리는 교육정책의 시행과 그 결과를 평가함에 있어서 '좋고 나쁨'과 방향성을 같은 개념으로 착각하고 있다. '서울이나 부산 중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부산으로 가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서울로 가면서 부산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옳다는 논리에 빠지면 안 된다. 교육의 근본개념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 오류에 빠져있다.

퐁즈(Pons)가 마르세이유 천문대의 문지기에서 관측기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운이 좋거나 누구에게 잘 보여서 승진의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가 일관된 통계로 정의한 진정한 천재의 개념을 좆아 그도 오직 자기 자신의 호기심에서 나오는 타는 목마름으로 지식을 탐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지한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혜성을 발견한 인물이란 자리는 그의 삶에 자연히 따라온 결과물일 뿐이었다. 이후 27년 동안 70세 생일을 70여일 앞두고 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자신을 화석화 할 때까지 그는 자그마치 모두 37개의 혜성을 발견했다. 프랑스 시골마을의 변변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과 명예가 아닌 오직 지식에 대한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교육의 본질을 훌륭하게 증명했다.

스스로의 내면이 음식을 요구하는 기관들로만 이루어져 있는지 지식을 요구하는 호기심이란 기관도 있는지 생각해 볼 기회조차 없애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이 갖는 모습이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교육의 가장 하찮은 목적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그것은 교육의 외면적 결과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어야 한다. 자유가 주어진 증거는 단 한 권의 책도 읽기 싫다는 개념을 실현하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를 자유의 내용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자라나는 자기 자식들에게 성공의 수단으로 성취하길 원하는 공부는 이미 공부가 아니다. 다만 개념이 왜곡된 그 무엇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구성원인 사회가 노벨상을 향한 열정이 있다는 것은 부자가 되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방법을 버리고 대신 복권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적어도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프지도 않은 배를 더 채우는 것을 성공으로 인식하는 사회보다 호기심으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지식을 탐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회가 교육의 본질에 더 가깝다. 학문과 이를 이루기 위한 사회 시스템인 교육은 모든 삶에서의 형식적 모습들을 그 결과물로만 해석한다. 카이스트에서 상위권 학생들이 고액연봉을 추구하기 위해 게임업체에 직업적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은 노벨상을 꿈꾸는 행위와 동일 선상에서 논의될 수 없는 '방향의 오류'이다.

7월 11일 망원경의 접안렌즈에 잡힌 자신의 첫 혜성을 보며 장-루이 퐁즈(Jean-Louis Pons)는 얼마만큼의 희열로 배고픔을 채웠을까?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