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나기황 시인) 본격적인 피서 철이 돌아왔다. 너도나도 시원한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피서(避暑)’하면 더위를 피한다는 본래의 뜻보다 여름휴가를 즐긴다는 쪽이 더 가깝다.
휴가의 의미는 ‘가족과 함께, 자연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가까운 물가로 천렵(川獵)을 가거나 계곡을 찾아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얘기가 됐다. 백사장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통기타를 치며 한여름 밤의 꿈을 노래하던 낭만은 이제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요즘 휴가는 본래의미와는 많이 어긋나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고 왔느냐’가 상대적 관심사가 되면서 “나도 갔었노라, 나도 맛보았노라”하는 식의 인증 샷과 후기를 SNS에 경쟁적으로 올리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다.
쉰다는 의미의 ‘휴(休)’는 온데간데없고 떠나는 것부터가 경쟁이고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셈이다. 정체된 도로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복사열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는 자동차의 행렬을 볼 때면 보는 이도 짜증스럽고 연민의 정마저 느껴진다.

잘 쉰다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휴가에 대한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든지 휴식과 여행의 즐거움을 함께 맛볼 수 있다. ‘피서’ 대신 ‘피정(避靜)’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피정이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지내는 일‘로 정의할 수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자신을 돌아보며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게 피정의 목적이며 여행의 도착점이다.
휴가는 휴식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 '바빠서 여유가 없을 때야말로 쉬어야 할 때다' 미 저널리스트 시드니J 해리스의 말이다.
마크 블랙은 말한다. '때로는 휴식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라고.
2, 30대 젊은 층에서는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자는 ‘욜로(YOLO)'트렌드에 맞춰 남미대륙으로 오지탐험을 떠나거나, 북유럽으로 테마여행을 계획하는 등 자신만의 휴가를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혼자만의 여행을 선호하는 ‘혼행족’을 위한 국내여행프로그램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온 가족이 템플스테이로 여름휴가를 의미 있게 보내는 것도, 도심 속 근사한 도서관에서 ‘북캉스(book+vacance)'를 즐기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7월 초, 제주도 ‘이시돌 목장’에서 운영하는 ‘자연피정’ 프로그램에 참가했었다.
농부들의 수호성인이 된 스페인의 성인 ‘이시돌’의 이름을 딴 목장이다. 60여 년 전 콜룸반 외방선교회소속으로 제주도에 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 J. Mcglinchey)신부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제주도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한라산 중. 산간지대의 드넓은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여 지금의 목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톨릭성지로도 유명하지만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피정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봄엔 유채꽃 축제, 겨울엔 눈꽃축제 식으로 계절에 맞는 피정프로그램으로 인기가 있다. 여름엔 비자나무 숲을 걸으며 온 몸으로 숲의 기운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나뭇잎에 매달린 달팽이를 만나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신 새벽 목장 길을 따라 걸으며 잘 생긴 경주마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일상의 기적을 다시 느껴볼 수도 있다.
미국의 배우 겸 가수인 에디 캔터는 말한다.
'천천히 인생을 즐겨라. 빨리 갈 때 놓치는 것은 경치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에 대한 통찰이다.'라고.
먹고 마시고 떠들썩한 피서대신 번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 ‘피정’의 참 맛을 느껴보라는 권고로 들린다. 서두르지 말고, 과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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