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순<전 충북예총 회장>

▲ 임해순<전 충북예총 회장>

당황했다. ‘평생 잊지 못할 사람’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지금까지 70여년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떠오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데….  꼭 집어 한 사람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온 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과 기관을 접촉해야하는 언론인 생활이 그러했고, 인생의 멘토로 삼아 바르고 행복하게 인생길을 걸어가기 위해 가슴에 품었던 사람들. 고맙고 감사해야할 이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잘못이야기 하고 글로 남기는 일. 자칫 자기 자랑이 되거나 오점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어쩌겠나. 후배 언론인이 모처럼 청탁해온 것인데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어 한참을 고민하고 펜을 들었다.

우선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도록 도와주신분이 먼저 떠오른다. 천주교 미국인 수사 조병호 데프레스님. 대학시절 기동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주소를 묻더니 ‘억만인의 신앙’이란 책자와 천주교 안내서를 보내 왔다.

 네 명의 성인 중 한 분을 평생 멘토로 삼겠다고 갈망하던 나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가슴에 와 닿았다.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과 함께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삶이 정말 멋지게 생각됐다. 하느님이란 생각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닮고 싶은 삶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내 탓이요”와 그 어떠한 죄도 고해하고 용서해주신다는 것 등 조 수사님은 나를 천주교 신자로 인도해 주셨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하기 힘든 세려대 대부까지 서주시고…. 그 분 역시 이국땅에와 가난하고 불쌍한 젊은이들을 도와주고 공부시키고 희망을 주시는 훌륭하신 분이셨다. 지금은 뉴욕으로 가셔서 거동도 힘드시다는 소식만 듣는다.

친구이야기를 해보겠다. 내가 신문사에서 서울 특파원으로 발령나자 조교친구였던 이남욱이 내 하숙 짐을 챙겨 자기집에서 함께 살자고 데리고 갔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 회장 비서와 수출과장 중역 등을 거쳐 미국 현지 사장을 맡아 일하면서 미국에 자리를 잡아 요즘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나 같아도 그렇게 못했을 우정이다.

신문사 부국장 때 신문방송학과에 출강하면서 알게 된 박허식 박사. 그는 나보다 연하지만 학문적 깊이가 있고 친형제 못지 않게 기쁜일이나 어려운일이 있을 때 친구가 되어 30여년을 서로 기대며 생활했다. 인생으로, 학자로 보람있게 함께했었는데 요즘은 건강이 안좋아 옛날처럼 대화를 할 수 없어 크게 아쉽다.

언론계에 있으면서 국회 출입과 편집국장, 중역을 함께 거치며 나를 이끌어준 안병훈 전 조선일보 사장, 편집인협회 회장을 맡으시면서 나를 협회 감사로 선임시켜 4년 동안 언론계 많은 인사들과 인연을 맺게 해주셨다.

 지금은 ‘기파랑’ 대표로 계시면서 가끔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언론인으로도 훌륭햐시지만 선배가 정치를 했더라면 대한민국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말을 주고받지만 정치인의 길은 끝까지 거부하신 훌륭한 언론선배님이시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수 많은 정치지도자와 VIP도 만났다. 그 중 고인이 되신 민기식 장군은 잊을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씀이나 속시원히 털어 놓을 수 없는 기밀사항까지도 나를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말씀해주시고 대화를 해주셨던 민 장군. 그 솔직 담백하고 커다란 가슴은 어린 내 가슴에 둥지를 품게 도와주신 분이시다.

 너무 솔직 담백해서 정치인생이 중단되는 바람에 크게 아쉽다. 미국 대사와 미군 수니와부와의 관계가 깊고 넒게 대화가 계속 됐더라면 한국정치사에 큰 도움이 되셨을 텐데…. 구체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생략하겠다.

끝으로 문화예술인인 한운사 선배님이시다. 서울에서 가끔 고향에 오시면 좋은 말씀, 깊은 인생에 관해 많이 이야기 해주시고 200년을 맞으며 새천년 노래가사를 써주시고 많이 사랑해주신 분이시다.

이 밖에 어디 한 둘이랴! 고맙고 잊지못할 분들게 늘 감사하고 기도드리며 지상은 물론 천상행복과 평화를 누리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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