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이현수학장) 31개 연합국의 ‘명령’에 가까웠던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민족적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게르만 민족. 그 틈새를 이용한 집단적 자기의식의 기저로 태동된 나치즘은 인간의 집단 오류에 대한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오늘날 성찰과 지성으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이 현혹되었다 기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나치즘의 사회적 유토피아 선동은 실상, 타민족의 노예화와 착취를 전제로 한 혹세무민이었다. 이를 통해 독일 민족의 생존권과 유럽 지배를 목표로 하는 과정에서 나치즘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반인류적 범죄와 참상은 ‘홀로코스트’ 나타났다.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귀결된 것이다. 나치즘의 경우처럼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가 속한 집단의 현실 인식 오류에 대해 자기방어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정화 기능이 정지되고 외부의 비판에 대해 집단의 힘과 정당성을 과신하게 만드는 과오를 저지른다. 집단구성원들은 내재된 오류와 위험성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근거 없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러나 나치즘의 최후처럼 그 결과는 늘 참혹하다.

 

확증편향이란 선입관을 옹색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말한다. 이른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말이 바로 확증편향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확증편향에 몰입되면 상대방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감정적으로 부정하며 스스로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나아가 확증편향에 취한 상태로 상대방과 토론을 하게 되면 여지없이 갈등은 확장된다. 이러한 확증편향을 피하기 위해선 자신이 주장하는 것, 자신이 굳건히 믿는 것부터 합리적으로 의심해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물론 난해하고 번거로우며 피곤한 일이다.

종종 주변에서 어떤 신문을 구독하는지를 질문받게 된다. 이렇다 할 중도언론이 없는 우리 사회 실정에서 보수를 대변하는 특정 신문이나 진보를 대변하는 여느 신문을 대면 정치적 색깔을 규정당하기 십상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나라를 대표하는 유력한 언론들이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 프랑스의 르몽드, 독일의 주드 도이치 자이퉁, 프랑크푸르트 알게 마이너 자이퉁, 일본의 요미우리와 아사히가 그렇다. 이들 언론은 외신 보도 시 대체로 반드시 참고하는 준거의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다. 물론 이들 언론도 사상적 색깔을 명확하게 지니고 있다. 허나 우리처럼 진영논리에 포획되어 언론으로서의 객관성마저 여하 불문하고 폄훼 당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보수층의 독자들은 진보라 불리 우는 신문들을 언론 취급도 하지 않으려 하고, 진보층의 독자들은 보수언론이라 평가되는 신문들은 애써 읽지 않으려 하는 현상이 있다.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사회현상의 객관화를 위해서라도 서로 다른 논조의 신문을 나란히 놓고 사실에 대한 교차 검증을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 태도가 되었다. 이렇지 않을 경우 확증편향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견해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도전적인 정보를 회피하면 당연히 정치적 지향성에 따른 집단 오류도 수반된다. 확증편향을 이겨내고 올바른 지적 성실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에 대한 일말의 수고가 필요하다.

오해 말자. 양비론적인 처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사실이 편향된 주장일 수 있으며 나아가 오류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담백한 처신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현안에 대해 진영논리에 포위되고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넘실대는 이념 과잉은 이미 사회통합의 임계점을 넘은지 오래지 않은가.

언론 용어인 게이트키핑은 편집자와 데스크 등의 결정에 따라 메시지가 취사선택되는 과정을 말한다. 게이트키핑에 따라서 같은 뉴스라도 부각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무시되기도 한다. 뉴스로서의 가치와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도 있어 공정성 시비가 일어날 때도 있다. 그래서 뉴스 과잉과 서사 과잉의 시대에 믿고 보는 심정으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면 편협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균형감을 갖추고 싶다면 정보의 선택지가 넓어야 한다. 언론의 반듯한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독자의 습관과 균형 잡힌 시선으로 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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