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루쉰·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영혼의 식민지화'

(동양일보)

동아시아 영혼의 식민지성과 고향 상실에 대해

오사카대학(大阪大學) 준교수(准敎授)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루쉰과 나쓰메 소세키에 공통된 심성으로 자국의 사회와 문화의 토착성에 대한 혐오와 부정의 시각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지향해야 할 자기’ ‘마땅한 자기 문화’를 구성하는 외부에서의 시각과 자기 문화의 실제 모습과의 괴리 사이에서 ‘찢어진’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기 동아시아의 지적 영위 속에서는 비록 ‘식민지화하는 측’이든 ‘식민지화당하는 측’이든 구조는 마찬가지다.
동경하던 서구에 몸담게 되었어도 자기가 몸 둘 곳이 없고, 비소(卑小)한 나라의 국민으로 그 자존심이 깨져버렸다.
그러나 본국에 돌아가고 나아가 식민지에 가게 되면 지배자로서 그 열등의식의 반면인 우월의식을 누릴 수 있었다.
결국 의식 속에서 그려지는 자기 이미지는 가능한 한 서양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과 절망감에 풀이 죽은 자기부정이 정신의 중추에 심어진다.
영국에 국비로 유학한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속은 항상 공허했습니다. 뭔가 불쾌하고 석연치 않는 막연한 것이 도처에 숨어있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안감을 안고 대학을 졸업했고,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마츠야마(松山)에서 구마모토(熊本)로 이동했으며, 또 같은 불안을 뱃속에 접어두고 마침내 외국까지 건너갔습니다. 저는 런던의 하숙집의 한 방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시시하다고 여겼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냐고 말입니다.”(‘그 후’).
이 공허함, 실체가 없음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것을 부정했을 때에 시작한 것이 아닐까? 즉 혼의 식민지화 이론에 따르면 자기 본래의 혼에 ‘뚜껑’을 닫고, 그 위에 ‘허위의’ 자기를 구축했기 때문에 아무리 그 허위의 자기 욕구에 응답하려고 노력해 봐도 어딘가 채워지지가 않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루쉰은 자기언급의 형식이 아니지만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그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을 적어놓았다.
유학 중의 루쉰은 한 중국인이 스파이 혐의로 처형을 당하는 영상을 통해 마치 남의 일처럼 웃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자기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의료로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예운동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루쉰은 <아큐(阿Q)정전·광인일기 외 12편(눌함·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역)>의 자서에서 자신이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 적막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자기 혼을 마취시켜야만 했었다고 한다. 이런 적막함을 루쉰은 바로 일본 유학 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그는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황야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이 몸 둘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명희는 대표작인 <낙동강> 중에서 고향의 상실을 그 중심 주제로 삼았다.
“졸고 있는 이 땅, 아니 움츠러들고 있는 이 땅, 그는 피 칠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여러 만평되는 갈밭이 하나 있었다. 이 갈밭이란 것도 낙동강이 흐르고 이 마을이 생긴 뒤로부터 그 갈을 베어 자리를 치고 그 갈을 털어 삿갓을 만들고 그 갈을 팔아 옷을 구하고, 밥을 구하였었다. (중략) 그 갈밭은 벌써 남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낙동강’)
결국 이 세 명에 공통되는 것은 자기가 그 존재를 맡길 수 있는 제대로 된 공간, 의미 있는 세계의 상실, 그리고 그 상실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 문예운동에 몸을 던졌다는 것.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감정은 거의 표현하기 힘든 적막이자 존재의 허무였다.
조명희는 고향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자기 속의 고향을 상실하고 그 공허하고 적막한 마음에서 작가활동을 했다.
자기 속에 있는 고향이란 자기 속에 본래 갖춰진 성품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상실이란 외부로부터 획득된 자기상을 자기에게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몸을 상한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이 조선 지배를 진행시켜 나가는 속에서 지병인 위궤양을 악화시켜서 토혈하고 1916년에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다.
루쉰은 일본의 침략이 전면화하는 와중인 1936년에 역시 지병인 천식의 발작으로 상하이(上海)에서 급사했다.
조명희는 고향을 쫓기고 러시아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고 처형당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침략과 피침의 역사는 반복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식민자의 정신을 상실시키고, 피식민자를 고향에서 떠나게 하며, 토착의 것에 대한 유린, 침략, 멸시가 만연하고, 자기의 내적인 토착성에 대해서도 자기멸시, 자기소외가 만연하는 고통의 역사였다.
실은 한·중·일은 현재에 와서도 그 병이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자기를 상실하고, 타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파악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자기를 고무시키고,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리고 자기를 잃은 그 상실감을 보상(補償)하는 것을 찾아서 헤맨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의해 자기 혼의 고향이 빼앗겼는지, 그것은 어떠한 폭력을 낳게 되었는지를 다시 묻고, 자기 마음속의 고향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19세기의 식민지주의에서 비롯된 동아시아의 혼의 상실로부터 회복할 길이기도 하다.

 

지배의 복수성과 근원적 저항

교토대학(京都大學) 교수 오구라 키조

1910년의 한국병합에서 1945년의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나는 ‘병합식민지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기간의 한국은 단순한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병합식민지’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가령 독일이 병합한 폴란드나 오스트리아를 ‘독일식민지’라고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한국을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적 사실로서는 일본과 한국은 합병했기 때문에 ‘같은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합병이나 병합이 아니었던 것도 분명한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은 독일과 폴란드·오스트리아와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병합식민지’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지금까지 의문시되어 오거나 은폐되거나 날조되어 온 것들이 상당히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일본이 한국을 순수한 객체로서 수탈이나 폭력적 지배만을 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사실(史實)에 대한 모독임과 동시에 역사를 산 한국인에 대한 멸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 수탈이나 폭력적 지배만을 했다고 한다면 왜 이 시기에 ‘일본에 저항하지 않은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 저항하지 않은 한국인’은 기회주의적이고 민족을 배반한 비겁자였을까?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당시의 한국인의 대다수가 많든 적든 기회주의적이고 민족 반역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올바른 한국인’은 항일빨치산 활동을 한 김일성 일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점)나 상해(上海)·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를 만든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원점)로 한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항상 김일성과 상해임시정부 중에서 어느 쪽에 보다 많은 민족정통성이 있는가라는 소모적인 투쟁을 남북이 전개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시기에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관계로 ‘합병상태’에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체성은 일본에 있었다. 한국인에게 부여된 주체성은 적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각각의 한국인의 주체성과 객체성은 100:0이 아니라 층차를 이루고 있었다. 가령 ‘주체성 28 : 객체성 72’라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단순한 식민지화에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
굴욕과 패배감을 에너지로 분출시킬 다른 출구를 어떠한 형태로든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병합식민지화’는 단순한 식민지화보다도 훨씬 고통스럽다.
이것은 철학적인 고통이기도 하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해서 ‘너는 타자다’라며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는 거의 같다’라고 하면서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때 피지배자의 자기동일성은 현저하게 혼란스럽다. 그리고 실은 이 때 지배자의 자기동일성도 기만에 가득 찬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적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한국은 ‘일본과 같다’고 하는 경험(병합)을 하면서 실제로는 ‘일본과는 다르다’는 경험(식민지)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아직도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에는 자기가 휘두른 폭력의 복잡성을 망각하고 있다.
조명희와 루쉰과 나쓰메 소세키.
그들이 고뇌한 것은 과연 무엇에 대해서였나? 내 생각에는 “‘지배의 복수성’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였을 것이다.
조명희는 병합식민지가 사람들을 다중·다층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은 여성활동가인 로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여야 합니다.”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지배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저항은 단순화된다.
적을 정하지 않으면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화된 저항에 의해 역으로 저항자의 삶은 갈기갈기 찢겨진다.
그래서 저항자는 단순한 저항을 지향하고 마는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도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의 저항의 길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문화나 관습, 사회나 조직 등, 자기에 달라붙어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진 채 완전히 알몸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이 길은 장렬하다.
루쉰이 ‘아큐(阿Q)’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중국의 전통에 축적된 모든 문화와 관습을 벗어 던지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큐야말로 궁극의 저항자였다.
지배의 복수성을 섬세하게 분석하여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의 문화를 통째로 내던져 알몸이 된 인간이 얼마나 근원적인 모습을 세상에 노출시키는가, 그 공포를 루쉰은 그렸다.
이것은 조명희가 그린 극빈의 사람들과 연결된다.
극빈이야말로 지배의 복잡한 전체성을 일거에 무화시키는 힘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어떠했는가? 그의 문장에 식민지조선에 대한 동정이나 죄책감의 시선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라는 논의가 떠들썩하다.
나는 소세키가 생각한 것은 식민지에 대한 표면적인 동정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소세키의 저항은 오직 한 가지, 하나의 맨몸뚱이의 ‘개체’(個)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실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행인>에서 “사람에서 사람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없다”(독일 속담)라는 절망적인 ‘절대적인 타자와의 단절’이라는 사상을 제시했다.
소세키의 ‘개인’의 깊이는 일견 지배자에 대한 저항을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근원적인 저항이었던 것이다.
 

근대 작가와 미래공창

미래공창신문(未來共創新聞)발행인 야마모토 쿄시(山木恭司)

근대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와 근대 중국의 루쉰, 혁명소련의 땅에서 객사한 조명희. 이 세 명의 근대작가는 어떤 미래를 열려 한 것일까? 동아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크게 변용되었다.
그들이 만약에 21세기 전반의 오늘을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떤 언론활동을 했을까?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생명은 미래로 흐른다. 인류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는 사람들의 생명의 모습에 달려 있다.
근대를 산 위대한 작가들의 걱정과 경고와 염원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역사적 인물들을 ‘과거’라는 닫힌 상자에서 해방시켜 지금의 미래공창드라마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형태로 대화·공동(共?)?개신(開新) 했을까? 긍정적인 눈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개인주의’를 신조로 한다.
당시의 일본은 서양열강에 부화뇌동하여 ‘무력’(武)과 ‘재력’(金)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유린하였다.
영토뿐만 아니라 영(靈)이나 혼(魂)까지도 식민지화하려고 하는 경솔한 모습에 깊게 실망하고, 미래의 지기(知己)를 찾아서 미래를 위해 붓을 휘둘렀다.
소세키는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한 후에 쓴 일련의 작품에서,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부도덕으로 치닫는 일본을 ‘멸망한다’고 예언하고 한반도의 독립을 시사하고 있다.
소세키가 희망을 건‘미래’는 백년 후(문하생인 모리타 소헤이森田草平에게 보낸 편지)의 일본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1년이 지난 지금, 헌책방의 주인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소세키는 말한다.
“대학선생도 글쟁이도 질색이다.”
세상을 깨우치는 붓을 휘두르며 언론계를 이끌고 있다. ‘미래공창신문’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유연한 연대를 맺으면서 ‘미래공창’의 소용돌이를 하늘높이 솟아오르게 할 것이다.   
중국은 대인의 나라이다.
루쉰은 21세기의 중국의 대약진을 보고 만족한다.
반면에 중국인의 일상에 잠재되어 있는 아큐적 요소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의 통찰의 정확함에 내심 놀랄 것이다.
그리고 청년시대의 루쉰이 좌절했던 21세기판 <신생(新生)>의 발간을 이룩하고 가까운 장래에는 활자미디어를 만들어 ‘미래공창신문’과도 연계하여 동아시아의 영성혁명을 지휘할 것이다.
조명희는 스탈린 휘하의 소련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숙청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은 그는 민중이 자력으로 아래로부터 민주주의혁명을 이룬 조국에서 이번에는 미디어혁명을 견인할 것이다.
목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철학의 확립이다.
그것은 한적 영성을 체득해 온 한국 민중이 생활 속에 새겨온 생명철학이다.
조명희는 말할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비참한 상황에 놓여도 ‘타자’와 상생하는 영성이 작동하고 있는 한 절망에 빠지는 일은 없다.
반드시 꿈과 희망을 찾아서 역경을 돌파하려고 하는 근원적 생명력이 작동한다고.
조명희는 <낙동강>에서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이것은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은 권력자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단호한 선언이다.
그리고 유사 이래로 지배층이 인민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어 온 가치관이나 상식에 의문을 품으라는 과거·현재 부정의 선언으로, 모든 의미에 있어서 ‘자기권위화’의 부정이다.
환언하면 ‘사람’은 평등하고, 어떤 사람도 그 자유로운 생명이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유사(有史) 이전과 같이 소유의식이 없는 낙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지와 함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싸우는 자기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으로 신성화할 때 그 오만함이 자기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멸망시키고 인류사회를 파멸시킨다는 통찰이다.
실제로 신이 된 스탈린은 수백만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원시공산사회와는 전혀 닮지 않은 노멘클라투라(지배자계급)를 만들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조명희의 혜안을 보아도 그가 피상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명희의 경고는 미래공창으로 연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경고이기도 하다.
중세유럽은 지중해에 튀어나온 이탈리아반도에 정치와 종교의 중심을 두었다.
일본열도와 지척의 거리에 있는 한반도는 동아시아철학의 총본산이 된다. 그렇게 확신하는 조명희는 중국과 일본의 매개역할을 담당하고 일본의 ‘미래공창신문’과 협력하여 미래공창에 매진한다.
조명희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 뜻을 이어받은 수천, 수만의 조명희가 한반도에는 군생(群生)한다. 마침내 동아시아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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