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흥 <서양화가·음성예총 회장>

어둠이 그리 짙지 않은 대문 밖. 항상 비슷한 시간에 할아버지는 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먼 곳을 응시 하곤 하셨다.

저녁 노을의 고즈넉한 풍경속의 그분의 모습은 내겐 화폭에 담고 싶은 소재중의 하나였다. 작고 인자한 표정, 하지만 침묵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해질녘 노을과 할아버지의 표정은 잘 어우러져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분은 내 마음속 한 점의 그림이 되어 떠오르곤 한다.

그때 할아버지의 그리움 가득한 침묵은 객지로 떠난 후 소식마저 끊긴, 언제 돌아 올지 모르는 혈육에 대한 그리움 이었을까….난 서울에서 태어나 30대 중반까지의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음성에서 처음 마주한 담배건조실은 신비했다. 또 흙담이 주는 미적 쾌감과 담배 농사하던 때 삶의 애환이 담긴 정서를 화폭에 담고 싶어 담배건조실을 소재로 1000여점을 그렸다.

20대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전국의 풍경을 쉼 없이 그렸지만 사생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늘 아쉬움이 가득했다. 문득 시골에 살면서 농촌을 직접 체험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음성의 한 시골마을에 정착해 그림에 대한 나의 꿈을 펼쳐나가고 있다.담배건조실 3채가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시골집을 선택했고 우선 마당에 있는 담배건조실을소재로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 이웃집 마당의 예쁜 꽃, 농기구, 우물, 생활용품 등 농가와 주변 물건들도 4000여점의 작품으로 표현됐다.

무엇보다 마을 분들의 힘들었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어떻게 자식들에게 헌신해왔는지, 가슴 속에 묻혀 있던 한과 정 등 그들의 생활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그림 작업은 현장에서 체험하고 표현하는 스케치이면서 인생 여행이다. 이런 작업은 농촌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느끼고 감성을 표현하고 싶은 개인적인 정서와도 잘 맞는다.

그래서일까. 매일 보다시피 했던 초점 없었던 할아버지의 눈에서 느껴지던 그리움, 반쯤 열려져 있던 철문에 드리워지던 노을빛까지. 그 모든 것들은 작품으로 표현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추억으로 내 화실에, 그리고 마음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돌아보면 시골에서의 삶은 나만의 고유한 그림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삶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나에게 소재로 다가와 줬고 나의 캔버스 위에 그림이 되어 줬다.

요즘 나는 자작나무에 심취해있다. 그것은 하늘과 맞닿을 듯 곧게 뻗어있어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단순한 색상과 절제된 나무의 표현은 또 다른 작품세계에의 도전으로 난 다양한 시도를 통해 나의 작품세계의 완성을 꿈꿔본다.

나이프 터치로 질감은 물론 자작나무의 특징을 살리면서 채도와 명도가 높은 색채를 이용해서 따스하고 밝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농촌에서의 그림 작업생활은 나의 삶은 물론 작품 활동을 더 풍요롭게 해줬다.나를, 그리고 내 작품을 더 풍요롭게 해준 농촌 시골마을에서의 생활….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본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