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공주시 우성면장>

그 선배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예비고사(현 대학수학능력시험)가 끝난 직후였다. 당시 대유행하던 연한 갈색의 바바리코트를 입고서 날렵한 체구에 간결한 얼굴로 공주사대 영어과 2학년이라며, 호기심어린 우리들에게 공주사대 입학을 권유하러 모교를 찾았다고 했다.

비록 마르고 크지 않은 체구의 소유자였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의욕과 열정을 담아 학교 설명을 하는 그를 보며, 한편 ‘배울 점이 있는 선배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선배를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다시 보는 것을 시작으로 이따금씩 만나게 됐다.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들 모임이 가끔 있었는데 중·고등학교에서 엄한 선배들을 겪다보니 2년 위인 선배가 까마득하게 보이고 어려웠다.

나는 당시 하숙비를 아끼려고 논산에서 공주까지 통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느 모임에선가 뜻밖에 ‘대학생활을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이라며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매일 각 신문사 사설을 4년 동안 읽으라는 것. 둘째, 동아리 활동을 하라는 것. 셋째, 팝송 한두 곡은 부를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좋은 조언이다 싶어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신문 사설을 읽다 보면 시사에 밝아질 뿐만 아니라 속독 능력, 한자 능력(당시 국한문 혼용)을 배양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대학을 그만두기까지 1년 반 정도 평일에는 어김없이 도서관을 찾았고 내 마음의 약속을 이행했다. 처음에는 10여개 신문사설을 읽는 데 2시간 넘게 소요됐다. 가끔 어려운 한자도 있었고 국한문 혼용이라 속도도 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학년 말쯤 되어서는 40분 정도에 독파할 수 있게 됐다. 선배의 조언이 내 삶에 좋은 지침이었고 난 훌륭한 자산을 쌓게 됐다.

두 번째 것도 실행에 옮겼다. 선배가 활동하고 있는 RCY(청소년적십자)에 가입한 것이다.

다만, 다른 동료들보다 늦깎이로 가입했고 종교를 갖는 것이 좋을 듯 했다. CCC(대학생선교회)에 먼저 가입해 3개월 정도 활동하다가 이를 접고 뒤늦게 들어갔는데, 활동 분야가 많고 마음에 들어 이게 내게 맞는 동아리구나 라고 느껴졌다.

특히 응급처치법 교육을 받고 초·중·고를 돌며 학생들에게 응급처치법을 가르치는 일,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에 개설된 야학(중학교 과정)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산악안전 교육과 특히, 인명구조원과 수상안전 강사 자격을 얻게 해 준 안전교육 등은 두고두고 내 삶에 자산으로 남게 됐다.

그리고 세 번째, 팝송 두어 곡 부르는 것. 틈틈이 용돈을 아껴 테이프를 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쯤인가 이모님 댁이 있는 운곡 유원지에서 어느 대학생이 난생 처음 들려주었던 스테레오 사운드의 ‘바빌론 강’, 나는 그 때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라며 환상적인 전율을 느꼈었다.

벌써 45년 전 1970년대 초, 배고픔도 아직 극복하지 못 했던 시절, 스테레오 사운드의 포터블 카세트에서 헤드폰으로 들은 ‘바빌론 강’의 도입부분은 정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이런 경험 때문에 팝송에 쉽게 애착이 갔고 테이프 숫자는 2년이 흐르는 동안 100개가 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리 팝송을 듣고 또 들어도 가사는 들리지 않았고, 외워도 외워도 따라 부를 수 없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81학번 학생 때로부터 20년, 공직에 입문한 지 10년 후,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이제는 한 두곡 부를 수 있게 됐다.

이렇듯 선배는 RCY 동아리 활동뿐만 아니라 내 대학생활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주시고 보살펴 주셨다. 그런데 난 그런 선배를 뒤로하고, 또 교육자의 길을 뒤로하고 2학년을 마치자 대학을 훌쩍 떠났다. 전화 한통 편지 한통 없이….

“지금 00학교에서 교감선생님으로 계신 조광연 선배님, 선배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도 연락 못 드리는 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계심에도 선배님을 생각할 때마다 죄스런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제 젊은 시절 큰 사랑으로 도움을 주셨던 선배님, 정말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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