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이란 용어는 여러 학문분야에서 사용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get)에 의하면 아동의 인지발달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각 단계의 경계는 한 번 넘으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는데 이를 결정적시기(critical period)라 한다. 다시 말해서 인지발달의 방향은 일방적이어서 한 번 거친 시기를 역행하여 이전의 자리로 돌아 갈 수는 없다. 이 방향이 쌍방적이라면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퇴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지나친 과정은 다시 반복하거나 또는 돌아갈 수 없으므로 '불가역적(不可逆的)'이다. 
  불가역성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 할 뿐 이 세상은 불가역적인 성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리적으로는 늘 불가역적이다. 아무리 바보라도 늙을 줄은 알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다시 젊을 줄은 모른다. 논리에 있어서의 불가역성 역시 상존한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첫째, 머리가 있다, 둘째, 눈이 있다, 셋째, 어깨가 있다, 등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모습이 이렇다고 해서 ‘사람’의 정의(定義)로 이를 사용 할 수는 없다. 정의는 예를 생성하지만 예는 정의를 생성하지 못하지 때문이다. 위의 세 가지 예를 잘 외운 그 누구도 아직 사람과 소와 돼지와 풍뎅이를 구분할 능력을 가지지 못 하는 이유는 바로 논리의 불가역성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문장의 주어와 동사, 목적어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이 때 선생님들은 '~은,~는,~이,~가'로 끝나는 말은 그 문장의 주어이고, '~다'로 끝나는 말은 동사이며, '~을, ~를'로 끝나는 말이 목적어라고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불가역성을 위배한 허황된 설명들이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까지도 교육의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개혁의 논의와 시도가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향해 이루어져 왔는지 알게 해주는 일이다.      
  '빵이 너무 먹고 싶어'라는 문장에서 주어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빵'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주격조사이며 이것이 붙은 것이 주어라고 외웠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서술어는 '먹는'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때 이 말을 한 사람 즉 '내'가 먹는 행위를 하고 싶은 것이고 먹는 행위의 대상이 '빵'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주어는 생략된 '나'이고 빵은 목적어이며 '먹고 싶다'는 서술어이다. 빵이 주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첫째, 어떻게 빵이라는 물체가 다른 것을 먹는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둘째, 이는 빵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직 밝히지 않은 미완성의 문장이므로 목적어를 채워서 문장을 완성시켜야 한다.
  '은, 는, 이, 가,'라는 말들이 주격조사의 예라는 사실과 ‘주격조사’라는 말의 정의를 혼동하면 누구든지 곧 바로 논리의 불가역성에 빠진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물가에 가지 마라'라는 말에서 '~가'가 붙었으니 이 문장의 주어는 '물'이어야 한다. 사람은 머리와 눈과 코와 입 등등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이를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와 눈과 코와 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라고 정의하면 이는 거짓명제이다. 이것이 바로 논리에서의 불가역성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이 논리적 불가역성들로 가득 차 있다.
   교육개혁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과목과 모든 분야에서 이 오류를 범한 개념들이 오히려 학문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해 왔다. 영어에서 정관사, To 부정사, 명사 등의 용법들을 외우는 학생들을 보면서, '~은,~는,~이,~가'로 끝나는 말이 주어라고 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공부를 하는 목적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높은 점수일 뿐이라는, 그리고 그 점수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것이 바로 인생의 마지막 목적이라는 논리적으로 이미 불가역적성을 범한 말들에 실질적 자격을 부여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학문의 본질과는 이미 유리되어 정당성을 잃은 이 시스템의 희생자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매일 매일 처절하게 보면서 우리의 교육개혁을 논리적으로 정의하는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지 고민해 본다. 
  이 땅에서는 교육개혁의 개념까지도 논리의 불가역성을 위배하여 자기 자식의 세속적 성공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우는 방향에서 접근되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참'이 아닌 '거짓' 명제들을 양산해 낸다. 교육이 정치를 낳을 수는 있어도 정치가 교육을 낳을 수는 없다. 순리를 좇아 불가역적이지 않은 개념들이 교육개혁의 장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