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빚갚을 능력 안 되는 ‘소멸시효완성 채권’
이달부터 26조원 소각·214명 구제…정부 발표에
“빚갚지 않는 사회 제도적 취약…정책보완 필요”

최종구(오른쪽 첫 번째)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서민금융진흥원 대강당에서 금융업권별협회장 및 금융공공기관장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동양일보 경철수 기자)정부가 ‘포용적 금융정책’을 통해 도저히 빚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채무자들 구제에는 적극 나서면서 정작 한순간 빚보증을 잘못 서서 돈 한푼 써보지 못한 채 대신 갚느라 어려움을 겪는 대위변제자들에 대한 구제책엔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방송인 이상민(45) 씨가 한 연예프로에서 밤잠도 줄여가며 빚(69억8000만원) 청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씨가 시청자들을 애잔하게 하는 이유는 개인파산회생절차란 쉬운 길을 놔두고 자신에게 투자했던 채권자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방송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있다.

기원전 1750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 허락 없이 가져간 곡물 전부를 반환하고, 채권도 취소토록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지역법조계에선 함무라비 왕은 ‘채권자 우위의 사회’에서 채무자 권리를 보호하는 내용을 법률에 담았을 것으로 보았다.

현재는 채무 조정, 파산 등을 통해 채무자를 보호하지만 채무를 갚지 못하면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여러 경제활동 및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른다. 또 시효를 연장해 가며 채무를 독촉할 수 있으므로 채권자 우위의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채무는 갚아야 하고 채권자의 권리는 당연히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벼랑 끝에 내몰린 채무자를 독촉하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 사회경제활동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공감데도 형성돼 있다.

이를 위해 금융위원회는 유례없는 ‘포용적 금융정책’을 펴고 있다. 최근에 정부와 금융권이 추진 중인 ‘소멸시효 완성채권의 소각’이나 ‘장기 소액 연체채권의 채무 경감 방안’ 모두 이런 정책기조다.

지난달 31일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 규모가 214만3000명에 25조700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이미 법률적으로 시효가 완성된 채권이므로 추심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상법상 시효는 5년이지만 법원의 지급명령 등으로 10년씩 수차례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국민행복기금의 소멸시효 완성 또는 파산면책 채권은 73만1000명에 5조6000억원이다. 또 자산관리공사, 주택금융공사, 예금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기술신용보증기금 등 금융공공기관 50만명에 16조1000억원이다. 이들 채권은 이달 말까지 소각된다.

민간부문의 소멸시효 완성채권에 대해선 정부가 소각을 강제할 수 없지만, 새 정부의 방침에 맞춰 자율적인 소각을 올해 안에 유도키로 했다.

이번 채권 소각에 민간 금융회사들까지 모두 참여하면 214만3000명의 채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채권 추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만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채무자가 일부라도 갚는 경우 채권이 부활해 채권 추심을 받게 된다. 또 연체기록에도 남아 금융거래가 제한된다. 이런 연유에서 자칫 채무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악성 채무자는 구제라도 받지만 빚보증 한 번 잘못서서 돈 한 푼 써보지 못하고 그 채무를 고스란히 떠안는 보증채무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동윤 금융위원회 담당사무관은 “채권 소멸시효가 완성된 경우만 해당되며, 보증채무자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아직 검토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청주지역 한 보증 채무인은 “채무자들은 그래도 돈이라도 써보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 구제를 받는다지만 정에 이끌려 보증한번 잘못섰다가 대위변제로 평생을 빚더미에 깔려 사는 우리는 뭐냐”며 “애초부터 한 푼도 갚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힘겨운 짐을 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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