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나기황(시인)

“꽃이 아무리 곱다 해도 인꽃(人花)만 하랴.”
어른들이 그저 하는 얘기이겠거니 허투루 들었는데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나이 들어 손주를 보는 재미가 그렇다.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꽃밭이 아니라 신천지에 와 있는 느낌이다. ‘귀엽다, 예쁘다’는 눈으로 보는 아이들의 모습이요, ‘뿌듯하고 경이롭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행복한 감정이다.
미국에 살던 딸 내외가 왔다. 스페인으로 직장을 옮기는 중에 잠시 짬을 내서 손녀딸을 데리고 왔다. 오목조목 양쪽을 나눠 닮은 유전자가 신기하기만 하다.
어줍게 문장을 만들어 가는 말마디가 더없이 귀엽고 행복하다.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며 자식을 키우던 젊은 시절에는 몰랐던 또 다른 감정이다.
손짓발짓 예쁜 짓을 하며 품으로 달려드는 손주를 담쏙 안아 든 할미의 표정을 보라. 세상 부러울 게 없다. ‘할비’를 부르며 뒤뚱뒤뚱 다가오는 모습에 녹아나지 않는 할아버지가 있을까. 의미 없이 하는 옹알이조차 할비,할미에게는 대단한 선문답이 된다. 어림짐작으로 알아듣기라도 하면 갑자기 득도(得道)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게 된다.
시니어들에게 ‘손주’란 존재는 말로써는 어찌 설명할 수 없는, 훅하고 가슴을 파고드는 존재다. 사랑의 유전인자가 ‘내리사랑’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도록 설계됐는지도 모른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말처럼 무조건적이고 무한대인 '내리사랑‘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들에 대한 ‘내리사랑’은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적인 인간본성 중에 ‘종족보존’에 대한 본성에 의한 것이라 했고,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은 ‘순진함과 모든 완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세계는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했을까’하는 명언으로 아이들의 존재가치를 설명한다.
저 출산 고령화 시대에 유별난 ‘손주자랑’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손주 가진 할머니 할아버지라면 친구들로부터 한두 번쯤 눈총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 두 번이지”,“귀하면 자기 새끼나 귀하지...”,“자랑하려거든 돈이라도 내고 하던지 손주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 살겠냐.”등 심술 섞인 푸념을 듣게 된다.
남의 손주자랑을 지켜보고 들어줘야 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달갑잖다는 얘기다. 역지사지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내 아이가 아니면 급격히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불가사의다.
손주사랑에 대한 사회적공감대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보고 싶을 때 ‘보는 것’과 사정상 ‘맡아서 키우는 것’이 다를 수 있다. 
SNS에 떠도는 ‘행복한 노후생활 10계명’ 중에 ‘아이 돌보지 않기’가 상위에 랭크돼 있다.
‘손자 손녀들이 올 때는 반가운데, 갈 때는 더 반갑다‘는 우스개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쓸고 닦고 이것저것 해 먹이느라 힘에 부친다면서도 손주만 번쩍하면 저절로 함박웃음을 짓는 젊은 할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돈, 내라면 내지, 뭐‘. 손주자랑에 그 정도 호기쯤 못 부릴 ’할비‘는 없다. ‘할미. 할비’들의 손주사랑에 정답은 없다.
앞면과 뒷면의 경계가 모호한 ‘메비우스의 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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