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터미널을 서성거릴 때다. 산적처럼 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아바나 갈 거냐고 물었다. 험상궂은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따를지 알 수 없었다. 흥정은 일방적으로 끝났다. 곧 떠나는 택시가 있다더니 주위엔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딨냔 말이 떨리며 건너갔다. 주먹을 맞대고 우두둑 소릴 낸 그가 한적한 뒷골목을 가리키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오금이 저려 발이 쉬 떼 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꼬르륵 소리가 오후 두시 햇살의 드센 기운을 업고 고막을 두드렸다. 시계를 본 그가 구시렁거리며 폰의 키를 거칠게 눌렀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엎드려 졸고 있는 개 한 마리뿐이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그마저도 먹을 걸로 보였다. 그때 인도 여자로 변신한 시바신이 짠, 하고 나타났다. 말쑥한 차림에 안경을 끼고 포장마차 앞에서 실실 웃는 모습이라니, 시바신 아니고선 그처럼 생뚱맞게 연출할 능력자는 없다. 포장마차 위에는 핸드백 크기의 바게뜨와 오이, 토마토, 계란들이 아무렇게나 얹혀 있었다. 통 속 몇 가지 재료는 뚜껑이 덮여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리어카 모서리에 붙여둔 햄버거 가격은 너무 착해서 곧바로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먹을 것 대신 침만 연이어 넘겼던 탓에 속은 더 쓰렸다.  

인도에서 쿠바로 시집 온 여자가 포장마차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팔고 있다. 메뉴는 달랑 한 가지뿐. 재활용이 습관된 나라여서 빵에 바르는 버터를 헤어젤통에 담아 쓴다.


동전을 꺼내려는 순간, 폰을 귀에 댄 산적은 졸고 있는 개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불콰해진 얼굴로 누구에겐지 모르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방광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지만 햄버거의 유혹은 떨치기 힘들었다. 눈치를 살피면서 인도 여자 눈앞에 동전을 들이밀고 빨리 만들어달라며 애걸했다. 그녀는 햄버거 만들어 본지 족히 몇 백 년은 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린 손짓으로 시뮬레이션 마친 여자가 프라이팬을 불 위에 얹고 기름을 둘렀다. 빛바랜 플라스틱 통에 계란을 깨 넣고, 얼굴에서 떼 낸 듯 흐물흐물한 오이를 넣어 휘저었다. 프라이팬에다 그걸 들이 부어 이리저리 기울였다. 계란 프라이가 익는 동안 칼을 써서 핸드백 크기의 바게뜨를 포 떴다. 다음으로 구석기 시대에 만들었음직한 또 다른 플라스틱 통을 열고 칼로 박박 긁었다. 크림인지 버터인지 모를 걸쭉한 액체를 바게뜨 단면에 펴 발랐다. 왜 하필 그때 신들의 나라, 인도에서 온 여자의 반지르르한 머리가 눈에 띄었을까. 

플라스틱 통의 라벨을 읽게 된 건 순전히 활자 중독 탓이다. 헤어 젤이란 글씨가 팝업창 열리듯 눈을 찔렀고, 엊저녁 랍스터 게걸스레 먹던 동영상을 거꾸로 돌릴 뻔했다. 주문을 취소하려는 순간 계란 프라이가 이미 늦었다며 고소한 냄새를 퍼뜨렸다. 그걸 믿어선지 인도 여자 손놀림은 이승의 삶이 끝나길 기다리듯 느긋했다. 잘라 둔 바게뜨에 소시지와 토마토를 얇게 저며 포개는데 지구가 자전 끝낼 만큼 시간이 걸렸다. 다 익은 계란 프라이를 잘려진 바게뜨 위에 얹는 동안 허기에 지친 내 영혼이 하늘로 붕 뜨는 것 같았다. 인내심 테스트를 패스했다는 듯 여자가 미소 스탬프 찍힌 햄버거를 건네줬다. 동전과 맞바꾼 햄버거는 무게며 부피 땜에 허리가 휘청할 정도다. 헤어크림 라벨 본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찜찜했지만 입에서 그라시아스, 란 말이 나온 게 의아했다. 인도 여자와 산적 사이에 짬짜미가 있었던 듯 딱 그 순간 택시가 도착했다. 

9인승 마끼나 택시에 빈자리는 하나뿐이다. 비좁아서 백팩을 앞으로 돌려 매고 차에 올랐다. 파일 크기의 햄버거가 시야를 가려 앞자리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찜통 같은 택시는 카리브해 바람으로 에어컨을 대신하려는 듯 거침없이 내달렸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텅 빈 위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들이친 바람이 헤어크림 바르던 기억을 죄다 앗아갔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탓인지 한 입  베어 문 햄버거는 미슐랭 별을 단 요리보다 맛났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쉼 없이 밀려들었다. 푸석거리는 바게뜨는 절반 넘게 일행들에게 날아갔다. 3열 중 가운데 앉았으니 여섯 명이 그걸 나눠 먹은 거다. 마술사 손이 스친 듯 햄버거는 잠시 만에 부스러기만 남긴 채 사라졌다. 배가 고파 폭풍 흡입을 해서인지 시바신의 초능력 탓인지는 모른다. 입안에는 유기농 채소와 목 넘김 부드러운 계란 맛만 남겨졌다. 걸핏하면 체하는 내가 물도 없이 그걸 먹었다는 건 마술 아니고선 이해되지 않는다. 시바신은 햄버거 어디에다 자신의 콧김을 불어 넣었을까. 헤어 젤 통에 담겼던 버터일까. 팩 하고 떼 낸 오이일까. 혹시 손때 묻은 토마토는 아닐까. 유기농 천국이니 어떤 재료든 시바신 맘대로 조화 부리는 게 가능하다. 백팩 위에 빵 부스러기만 남겨진 걸 본 뒤 몰려드는 바람이 드세다는 걸 알았다. 카리브해에서 날아든 바람은 내 뺨의 살갗을 쥐어뜯어 옆 사람에게 갖다 붙일 기세였지만 속이 든든해서 견뎌낼 수 있었다. 바게뜨의 파삭거림과 오이, 토마토, 계란 프라이며 버터가 인도 여자의 미소와 절묘하게 버무려진 햄버거, 신의 한 수를 맛 본 감동이 커서인지 말레꼰 때리는 파도 소리가 까페 엘 꾸아히리또 악단 연주처럼 흥겹게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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