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루쉰·나쓰메 소세키를 통해 보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

(동양일보)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과 현대적 의의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1.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靈性論)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1870~1966)는 <일본의 영성화(日本の霊性化)>(法蔵館·1947)에서 세계평화실현을 위해서는 단지 핵전쟁에 의한 인류절멸의 ‘심리적 공포’에 대한 호소와 ‘경제적 이익을 계기로 한’ 세계평화 이념을 추진해 나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생각은 ‘외면적·통제적·억압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불충분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면(內心)으로부터의 자주성(自主性)을 지닌 정신적 추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그 추진력이 바로 영성이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다이세츠에 의하면 영성이란 형상(形相)을 지니지 않고, 학문적 지식·과학적 지식, 즉 ‘분별지(분별의식)’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개체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개체와는 다른 초월적인 것이다.

영성이란 ‘분별식’(分別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무분별식(無分別識)’(불교에서는 ‘지혜’라고 부른다)의 ‘작용’에 붙여진 ‘가명’(假名·비실체적인 것에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영성을 알기 위해서는 영성과 자신이 일체화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기를 초월한 자기가 개체로서의 자기를 보는 것으로, ‘개체적 자아(個己)가 초개체적 자아(超個己)를 통해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태는 진실에 ‘눈뜨게 된’ 진실의 자기, 즉 영성적으로 자각화된 자기와 육체를 지닌 번뇌적 자기의 절대적 ‘모순적 자기 동일’의 모습을 의미한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이와 같이 영성화된 인간이야말로 평화건설의 주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전쟁 중인 1944년에 ‘출진’(出陣)을 앞둔 오오타니대학(大谷大學)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송사를 보냈다.

“제군들은 전장에 나가더라도 결코 적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당신들도 결코 죽어서는 안됩니다. 설령 포로가 되어도 좋으니까 건강하게 돌아와 주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그 자리에 있던 육군성(陸軍省) 소속장교는 연단에 뛰어 올라가 스즈키 다이세츠를 질책했다고 한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발언은 영성화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이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은 인간의 주체화된 모습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신도(國家神道)로 이어지는 신도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의가 있다.

그는 전후 일본인이 자주적(自主的)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성이 존재하지 않는 신도’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신도’ 비판은 일관된 것으로, 그가 전쟁 중에 “‘신도’적 직각(直覺)에는 일본적인 영성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적 영성>·1944년)라고 말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의 문제점

그러나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에는 불충분한 점도 존재한다. 영성에 기초한 평화실현의 이론적 구조화가 불명확하고, 인간의 주체화와 타자와의 유대·상생의 모습과 영성이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스즈키 다이세츠는 영성의 작용으로서의 자기초월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그 자기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작용’은 자기를 초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관념화된 것이다. 그의 논리구조 속에는 자기를 초월한 관념을 초월한, 자기의 밖에 있는 ‘타자’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타자와의 상생의 모습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이 문제점은 절대적 ‘모순적 자기동일’의 내용과도 관계된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個己)가 초개체적 자아(超個己)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상태에서의 ‘개체적 자아’(個己)와 ‘초개체적 자아’(超個己)의 관계이다.

양자의 관계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자기가 ‘절대자’로서 완성되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의 타자와의 유대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평화실현에 있어서 상생관계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 문제점을 극복한 예는 남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사상이나 근대 한국의 동학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남아프리카에서의 ‘우분투’(Ubuntu) 사상과 근대 한국에서의 동학사상

‘우분투’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분리) 철폐·전인류의 상생에 의한 민주적 남아프리카 건설의 토대가 된 사상이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격언으로 상징되는 ‘우분투’ 사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된다.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보장·긍정하고 각자가 서로 연대하고 관계를 맺으며 타자와 힘을 합치는 가운데, 자신이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와 그 실현 방식을 확립해 나간다.”

우분투는 인종적 차이를 넘어서 남아프리카의 모든 사람들의 기저에 존재하고 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비인간적 현실을 허용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태도결정을 촉구하였다. 그 물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와 사회주의 사상에 던져서, 사람들이 연대하고 비폭력적 비복종을 관철시켜, 마침내 1994년에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철폐시켰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후에 전개된 민주적 남아프리카 건설에서 우분투의 영성에 인도되어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도 과거의 학살에 가담한 죄의 참회고백을 통해서 용서를 하는 ‘진실화해위원회’(1967~1998)가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투투 명예 대주교에 의해 설립되었다.

상호관계성을 축으로 한 평등·존경·타자와의 상생의 우분투 사상은 한국의 동학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도 있다”고 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의 구체적인 전개는 ‘접’(接)이라고 불리는 귀천을 없앤 상호부조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의 적극적인 측면은 평가하면서, 그 문제점은 우분투나 동학과 같이 상호관계성을 축으로 한 ‘서로 살림’에 의한 ‘피억압자’로부터의-‘억압자’를 포함한-인간해방사상의 주체적 파악으로부터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자기 개벽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성환

<논어>에서 ‘광인’(狂人)은 이상 정치를 꿈꾸는 공자를 비웃는 남방의 도가계열의 은자(楚狂接輿)로 등장한다. 반면에 공자는 이런 광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좇아가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호학자(好學者)로 그려지고 있다. <논어>의 다른 곳에서는 공자가 고대의 ‘광인’에 대해 “자유분방했다”라는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古之狂也肆). 이처럼 고전에서의 ‘광인’은 도덕을 넘어서 있거나 기존의 틀로부터 자유로운 ‘제도권 밖의 이방인’ 또는 ‘타자’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루쉰은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 자신의 작품 속에 ‘광인’을 재등장시켜 2천년 동안 중국사회를 지배해 온 유교문화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마치 청나라의 대진(戴震·1724~1777)이 성리학은 “리(理)를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以理殺人)고 비판했듯이, 루쉰은 광인의 입을 빌려 유교의 “도덕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道德食人)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면, 루쉰은 ‘유교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니체나 루쉰이 자기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은 동양이라는 타자를, 동양은 서양이라는 타자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기 전통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 위에서 비로소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모든 일이란 연구해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옛말부터 사람을 잡아먹어 왔다는 것은 나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서 역사책을 펼쳐서 조사해 보았더니, 이 역사책엔 연대도 없고 각 페이지마다 비스듬하게 ‘인의도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에 오밤중까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비로소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또 다른 글자를 찾아내었다. 책 가득히 쓰여 있는 두 글자는 ‘식인’(食人)이라는 것이었다. (<광인일기>)

여기에서 ‘연구’는 칸트식으로 말하면 ‘비판’(critique)과 유사하다. ‘유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서구주의자들처럼 유교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주의자들처럼 유교를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애정과 증오, 부정과 긍정과 같은 주관적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유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과연 유교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바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깔고 있는 철학적 전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사회적 기제 위에서 작동되었는가?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한가? 유교를 오늘날에 되살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가? 등.

이에 반해 가장 유교적이라고 자처하는 한국인들은 정작 유교를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거나 일방적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거나 하는 극단적 태도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비단 유교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나 서양철학과 같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 사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기만의 관점이나 이해의 틀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외래 사상이나 문화를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한국은 반대로 그런 중심이나 관점이 희미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조명희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루쉰이 ‘전통’이라는 중심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전통을 모색하고자 했다면, 조명희는 ‘외부’라는 중심을 해체시키고 자기의 중심을 잡고자 했다.

우리에게는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아무 것도 없다.… 우리에게는 남에게 빌려온 철학도 있었고 종교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영혼의 한때 기숙사는 되었더라도 우리 집은 아닐 것이다. 남의 것이라도 자기의 물건으로 만들면 자기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도 또한 하지 못하였다. 헤브라이인의 사막에 세운 집과 인도인의 삼림 속에 세운 집을 우리 땅에 (그대로만 옮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 우리의 몸과 영혼에 꼭 맞는 집을 지어 갖든지 옮겨 고쳐 짓든지 하여야 할 것이다. … 남의 집을 그대로만 가지고 살지 못하게 됨은 우리 과거생활의 실패를 보며 현재생활을 놓고 보아도 알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살 집을 장만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집을 세울 만한 힘이 없어서 그러한지, 있고도 경우가 허락지 않아 그리하였든지 여기에는 얼른 말하지 어렵다.(<집 없는 나그네의 무리>)

여기에서 조명희는 한국인의 정신사를 자신의 사상적 집을 짓지 못한 채 오래도록 정신적 떠돌이 생활을 반복해 온 ‘영혼의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자기비판일 수도 있다. 고려나 조선은 불교나 유교를 자기화(한국화)해 온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용어로 말하면 ‘作’(창조)이 아닌 ‘述’(해석)에 가깝다. 조명희는 한국문명에서의 ‘作’의 부재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식적 식민지 상태가 바로 정치적 식민지를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즉 조명희가 살았던 일제 식민지시대에, 천도교나 대종교 또는 증산교나 원불교와 같은 이른바 한국의 자생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리적 식민지가 극에 달했을 때 정신적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가장 치열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사상적 운동을 이들은 ‘개벽’이라고 불렀다. 개벽은 오랫동안의 영혼의 나그네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영혼의 집을 지어보자는 사상운동이다.

나는 영혼의 탈식민지화는 바로 이 개벽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자가 “나(吾)는 나(我)를 잃었다”고 선언했듯이, 껍데기같은 낡은 ‘나’(我)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새로운 참나를 회복하려는 정신이 바로 영혼의 탈식민지화로 가는 출발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다운 자기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타자와의 진정한 대화도 가능해지리라 믿는다.

 

포석 조명희와 ‘낙동강’… 떠나감과 돌아옴

원광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이남희

포석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진천에서 출생해 1938년 5월 11일 소련에서 44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1894년(고종 31)은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이 일어난 해이다. 갑오개혁 때 전근대 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고려 광종(958) 이후 1000년간 전통 사회를 지탱해온 과거제 역시 폐지되었다. 그 해에 포석이 탄생했다는 점 자체가 그의 삶의 행로와 관련해서 시사적이라 하겠다.

포석은 쇠락해가던 양반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다. 부친이 70대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포석은 4세 때 부친을 여의었으며, 큰 형이 아버지 역할을 했다. 포석은 진천 신명학교를 마쳤으며, 1907년 민식과 결혼했다. 그리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몇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했으며, 같은 해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고보를, 도쿄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다. 생활고로 귀국해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의 삶 자체가 급격하게 변해하고 있던 우리 민족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는 자국 내의 경제적인 어려움, 국제적으로는 미국, 유럽 등 열강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포석은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20년대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시와 소설, 희곡, 수필 등을 썼다. 1920년대 중반 포석은 신경향파 작가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카프(KAPF) 결성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활약했다.

포석의 대표작은 1927년에 발표한 ‘낙동강’으로, 민족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의 현실과 그에 대한 문학적 반응 태도를 뚜렷이 나타내주는 것이 ‘낙동강’이다. 조국의 운명과 자신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이듬해 1928년, 이 작품의 주인공이 택한 길을 그 자신도 실행했다. 국내에서 생활을 단념하고 국경의 넘어 소련으로 그 자신도 실행한 것이다. “열렬하던 민족주의자가 변하여 사회주의자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 파벌이란 시기가 오면 자연히 괴멸될 때가 있으리라” “혁명가는 생무쇠쪽 같은 시퍼런 의지(意志)의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여기서 우리는 1928년 망명 당시 포석이 가졌던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역사는 또 한 바퀴 구르려고 한다. 소나기 앞잡이 바람이다. 깃발이 날리었다. 갑오동학이다. 을미운동이다. 그 뒤에 이 땅에는 아니, 이 반도에는 한 괴물이 배회한다. 마치 나래치고 다니는 독수리 같이. 그 괴물은 곧 사회주의다. 그것이 지나치는 곳마다 기어가는 암나비 궁뎅이에 수 없는 알이 쏟아지는 셈으로 또한 알을 쏟아 놓고 간다. 청년 운동, 농민운동, 형평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오천년을 두고 흘러가는 날씨가 인제는 먹장구름에 싸여간다. 퐁풍우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그 비 뒤에는 어떠한 날씨가 올 것을 뻔히 알 노릇이다.” “예전에 중농(中農)이던 사람은 소농(小農)으로 떨어지고, 소농이던 사람은 소작농(小作農)으로 떨어지고, 예전에 소작농이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풍비박산하여 나가게 되고”

‘낙동강’에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사회의 다양한 시대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청년 운동, 농민운동, 형평(衡平)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당시의 사회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민요, 노래 등과 같은 기록적인 성격을 띠는 서술도 눈에 띈다. 포석의 ‘낙동강’이 갖는 또 다른 미덕의 일단은 그 지점, 기록화적 서술에 있지 않을까 한다.

주인공 박성운은 국외에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학살되고 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해외에 가서 다섯 해 동안을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강이라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낙동강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낙동강이 생각날 때마다, 내가 이 낙동강의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임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이란 것도.”먼 서간도, 남북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지를 떠돌면서도 그는 자신의 고향, 낙동강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낙동강’에서 포석의 뜻은 형평 사원의 딸, 로사에게로 이어진다. 자신을 죄어오는 현실의 압박을 느끼게 된 로사는 망명길에 오른다. 소설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다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이 땅을 떠나면서 동시에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을 기대고 있다.

포석은 점차로 자신을 죄어오는 현실의 무게를 느꼈던 듯하다. 일찍이 박성운이 떠났고, 뒤이어 로사가 떠나갔듯이, 포석은 마침내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망명하면서도 그는 언젠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그 날을 기대했었을 법하다.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은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언젠가 다시금 조선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자신을 상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련으로 망명한 직후, 그는 항일 산문시 ‘짓밞힌 고려’를 발표했다(1928.10). 그 시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일본 간첩’이라는 것. 항일시를 쓰는 일본간첩.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찬양하는 시와 소설을 쓰는 일본간첩. 투옥된 지 채 1년도 안되어 그는 처형당하고 말았다.[1956년 그는 복권되었다.]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거칠게 흘러가는 물살 앞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한 개인의 삶은 너무 허무하고 쉽게 부서져버린 것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 그는 다시금 낙동강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낙동강의 첫 구절은 지극히 상징적이라 하겠다.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 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진정한’ 독립운동가, 포석 조명희 선생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박맹수

나이 60대 초반에 접어든 필자가 포석 조명희 선생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0년대 중반이었다. <녹색평론>지상에 이미 고백했듯이, 필자는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 때 군인 신분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쏴 ‘학살’했던 계엄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연락장교 신분이었는데, 이 사실은 필자가 ‘역사의 죄인’이자 ‘가해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5월 광주 당시 필자가 ‘가해자’였다는 깊고도 깊은 상흔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씻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세세생생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을 듯싶다.

1981년 6월말에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필자는 영혼 깊숙이 새겨진 상흔를 씻어내기 위해 야학(夜學)을 개설하고, 그 야학을 거점 삼아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른바 ‘투사’로서 삶을 새로 시작한 것이다. ‘투사’로서 삶은 1980년대 내내 이어졌고, 특히 한국학대학원 재학 시절(1983-1990)에 정점에 달했다. 바로 그 시절에 사회주의 문학가요 독립운동가인 포석 선생을 가슴에 모셨다.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있어 포석 선생은 필자를 포함하여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모든 이들이 닮아가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사회는 포석 선생에 대한 공개적인 학습, 교육 등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모임에서 그 이름을 거명하는 순간 바로 비밀리에 연행되거나 수감되는 그런 시대였다. 이런 시대였기에 포석 선생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문헌이 있을 리 없었다. 소위, 지하 운동권에서 유통되고 있던 팸프릿 아니면, ‘해적판’으로 돌아다니는 외국 서적을 통해 겨우 배우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한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1980년대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 ‘영혼의 식민지화’ 현상이 강고한 형태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웅변한다고 하겠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이들이 포석을 모신 이유는 1980년대에도 여전히 ‘영혼의 식민지화’ 현상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던 이 땅의 현실을 ‘변혁(變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변혁’의 몸부림 역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최근에야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 식민지 시절처럼, 필자가 변혁 운동에 가담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 역시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필자가 1980년대에 가슴에 모셨던 포석 선생의 면모는 시대적 제약 때문에 ‘불완전’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작년(2016)부터 동양일보와 동양포럼 덕분에 포석 선생에 대해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제야 비로소 ‘영혼의 탈식민지화’의 차원에서 포석 선생의 삶과 사상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다가오는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3박 4일의 일정으로 포석 선생이 온 몸을 던져 ‘수전병행’(修戰竝行; 교육운동과 독립전쟁의 병행)하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우수리스크의 조선사범학교를 찾아가기로 했다.

주지하듯이, 포석 선생은 35세 때인 1928년 8월에 구 소련으로 망명, 그 첫 정착지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었다. 1911년에 건설된 신한촌은 연해주지역 한인 집단거주지역으로써 일제 강점기 연해주지역 독립운동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포석 선생은 1929년에 우수리스크에서 약 1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륙성촌으로 이주,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1년에는 다시 우스리스크로 이사하여 1935년까지 5년간 우수리스크의 한인교사 양성학교인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하여 ‘작가의 집’에서 사회주의 작가 생활을 하다가 1938년에 스탈린의 한인 배제정책으로 스파이로 몰려 총살을 당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포석의 뜨거웠던 실천 현장을 찾아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진정한’ 독립운동가 포석 조명희 선생의 면모를 확인할 예정이다. 이 여행에는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원 30여 명도 동행한다.

 

조명희 문학과 그의 시대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1. 당대라는 콘텍스트-식민적 이중성의 문제

① 식민지는 ‘근대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와 동떨어진 근대담론이란 없다. 식민성과 근대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일반은 근대적 제도를 식민지에 도입함으로써 주민을 식민지적 질서에 편입시키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도록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책략이 문화적 층위에서 변함없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는 없고, 문화적 층위에서는 토착적인 것과 서구적인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가 지속적으로 경쟁, 갈등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민지에서 근대는 ‘폭력이자 유혹’이라는 완연히 양가적인 형태로 현현한다. 그것은 ‘거부이자 매혹’이라는 양가적인 심층의식의 무늬를 그려낸다.

② 언어의 경우 국어의 순수성이 곧 종족의 순결성을 담보한다는 민족주의적 발상은 식민지 현실 실재와 거리가 있다. 1900년대 국어 표기법 논의를 뒤로하고, 합병 이후 조선어/일본어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호언어적 실행(translingual practice)-근대와의 접촉에서 기의가 바뀌거나 새로운 번역어가 형성되는 과정과 관련. 번역어의 성립과 근대를 말한다. 역서로서의 근대적 문학개념을 위시해서 국가. 민주주의 , 자연, 예술 등 번역된 근대어. 말의 질서가 사물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근대는 새로운 언어의 체계

●이중언어적 실행(bilingual practice)-조선 문인의 일본어 사용과 관련, 일본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이인직과 이광수, 일본어로 구상하고 조선어로 글을 쓴 염상섭을 비롯하여 일본에 유학한 대부분의 조선 문인들은 이중언어적 글쓰기를 수행했다.

근대문학 연구에서 이러한 이중성에 주목하면서 문학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의 경험을 두텁게 기술하는 것이 과제이다.

③ 동아시아의 근대 지성은 근대를 배우면서 근대를 넘어서는 이중과제를 안고 근대 역사의 주체적 행위자들로 등장한다.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대는 배울수록 주체를 흔들어서 끊임없이 자의식이 강요되는 행위가 되었다. 근대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복음처럼 받아들인 지성에게는 일시적인 일체감의 행복보다 궁극적 좌절을 가져다주었고, 극복이 조급한 이들에게는 폐쇄적 자기기만의 감옥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들이 추구한 근대의 모험은 민족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는 ‘민족’과 ‘민족주의’는 ‘제국’과 ‘제국주의’의 대타 담론이 될 위험이 있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보다 근대의 관점에서 우리를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민족주의의 개념폐기가 아니라 근대 안에서 민족과 민족주의를 사유하는 시점의 전환을 의미한다.

 

2. 조명희의 문학

① 문학여정-조명희 문학의 여정은 희곡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시에서 소설로 나아간다. 구소련에서는 주로 시와 평론을 썼고, 소설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구소련에서의 작품들은 온전히 보전되지 않지만 시간적 공간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문학활동 초기부터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 결합한 형태의 문학을 최후까지 지속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문학여정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고향’이다. 이 때 고향은 ‘장소성’과 ‘이동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② 부재의식

“자연을 맞추어 우리의 몸과 영혼에 꼭 맞는 집을 지어갖든지 옮겨 고쳐짓든지 하여야 할 것이다. 소수를 말하지 말고 전체의 우리를 놓고 보라. 남의 집을 그대로만 가지고 살지 못하게 됨은 우리 과거생활의 실패를 보며 현재생활은 놓고 보아도 알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살 집을 장만하지 못하였다. ”(<집 없는 나그네의 무리>, 311쪽)

고향은 집이 있고, 가족이 있는 홈이고, 자유와 행복한 생활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 요소들은 작품 현실에서 처절하게 부재한다. 현실적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고향일 수 없다는 정신적 고향의 부재의식은 현실부정의 소산이다.

③ 부정적 현실의 해결책

조명희 문학은 현실의 암울함을 피하지 않고 부정한 토대에 미래에 대한 열망을 구축한다. 단지 열망하지 않고 행위로 구체화한다. 그에게 고향은 위의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어갖든지, 옮겨짓든지 하여야 할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고통스런 현실에서 떠나는 것은 도피의 성격이 아니다. (최근 작성된 황석우 연보에 따르면, 1921년 1월 17일 원종린, 조명희, 정재달 등은 의거단(義擧團)을 조직한다. 당시 조선 총독부 경무국은 의거단이 사회주의자와 연결, 결탁하여 경성에 있는 친일자, 밀정 등을 물색하고, 이를 구타 징계함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보고했다.) 정치적 행동은 ‘우리 몸과 영혼에 꼭 맞는 집을 지어갖든지 옮겨 고쳐 짓’는 행위에 해당한다. 새로운 고향을 건설하려는 의지와 의미가 더해지면서 떠나는 행위는 미래지평과 현실 너머의 이상향을 조준한다. 그래서 고향은 주어진 공간, 경험, 정황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하는 대상이 된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능동적이고 낭만적이다.

④ 문학정신

그는 한문을 사용한 세대이다. 유학이 추구하는 선비적 정신의 기억과 관습에 신문학을 더한 개화기 지식인의 전형일 수 있지만 엘리트의식을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 내의 노동자 농민 다수를 타자로 계몽하지 않는다. 다수의 민족 구성원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소수를 말하지 말고 전체의 우리를 놓고 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민족 단위로 현실을 보려는 노력 때문이다. 어느 범주에 주체의 위치를 두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의 현실을 집단의 비참한 운명과 관련해서 보려는 시각은 문학 여정 내내 집단 내 관계에서는 계급해방, 국가 간 관계에서는 민족해방이 결합한 형태가 최후까지 지속되는 원동력이다.

⑤ 문학적 성과의 의미

조명희 문학은 여러 방향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문학 정신과 작품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몸에 꼭 맞는 집짓기와 옮겨 짓기’로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 안의 ‘의거단’ 활동과 문학 활동이 ‘집 집기’에 해당한다면, 구소련으로의 국경횡단과 문학 활동은 ‘집 옮겨짓기’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 집짓기와 집 옮겨짓기는 ‘고향의식’으로 수렴한다.

 

영혼의 탈식민지화 - 현실 인식과 투쟁

청년농사꾼 김예린

영혼이 식민상태에 있다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에 종속되어 독립적이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쉬운 예로 어려서 트라우마를 갖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것에 얽매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요즘은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포럼에서는 한중일 국민작가의 문학작품을 비교하면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논의한다고 하기에 그 의도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필자는 영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신처럼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영혼이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도 사회적, 국가적 나아가 국제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3국의 학자들이 모여야 한다고 잠정적으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 세 작가의 작품 속에서 인물 개개인의 심리와 행동이 어떤 배경으로 인해 생기는지에 주목했다.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특히 조명희와 루쉰은 당시 대중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도구로 문학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루쉰이 활동했을 당시 중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패배하고 혁명을 통해 근대적 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옛 중화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루쉰은 사람들이 자국민의 죽음을 보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문학을 통해 경각심을 일깨우려 했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의 아Q는 열강에 침략을 당하면서도 옛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인이 투영된 인물이다. 아Q는 뺨을 맞으면서도 정신승리법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한다. 정신승리법이란 체면이나 허위에 사로잡혀 무력한 자신의 상황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이다. 즉 루쉰은 현실과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파국에 치닫게 된다는 것을 아Q라는 인물을 통해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명확한 현실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루쉰의 경고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필자가 배운 역사에서 우리의 패배를 인식하는 것이 아Q가 정신승리법으로 현실을 회피하고 자위하는 것과 공통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은 오랑캐의 침략을 받았고 근대에는 일본의 식민통치와 6.25전쟁까지 수많은 침략과 전쟁을 겪었다. 그런데 역사상 거의 모든 경우에서 한국은 공격을 받은 입장으로 방어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화를 추구한 우월한 민족이었고 적을 왜놈이라 오랑캐로 칭하며 그들이 미개했기 때문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자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로 여겨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동시에 패배한 상황을 합리화했기 때문에 종속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에서 해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포석 조명희가 글을 썼던 당시 한국은 일제식민지 상태였다. 그는 작품 ‘낙동강’에서 로사라는 여성 인물에게 그의 바람을 투영한다. 로사는 식민지라는 국가적 문제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힘들어한다. 이때 성운은 로사에게 가정, 사회, 같은 여성, 남성,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까지 즉 모든 것에 대하여 저항하라고 말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는 투쟁이라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낙동강’에서 저항은 이 땅을 떠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조선에서 하는 운동이 힘들지라도 떠나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조명희에게 낙동강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여 독립에서 멀어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즉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맞서서 저항하여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진정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필자는 로사를 보면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가 떠올랐다. 영혜는 가족, 부부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 그리고 나아가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에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영혜가 투쟁하는 방식은 부부관계를 피하고, 남들 앞에서 속옷을 입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밥을 전혀 먹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영혜를 비정상적으로 보았지만 영혼을 억압하는 것은 어쩌면 도리와 윤리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일지 모른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영혜가 곡기를 완전히 끊고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어느 날 병원 복도 한 켠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장면이 나온다. 물구나무를 선 영혜는 나무를 연상시키는데 영혼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을 암시한다. 즉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죽음에 가까워지지만 역설적으로 생명과 자유를 얻었다.

영혼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관성이나 익숙함에 젖어들게 마련이므로 이는 매우 껄끄럽고 낯선 과정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아 우리가 패배한 순간과 반대로 성취한 순간을 되짚는 것이다. 문제를 파악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저항과 투쟁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함께 논의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피해자 혹은 가해자였고 그 속에서 행해졌던 억압과 분노로 아직까지 후유증을 겪고 있다. 미래를 위해서는 더 이상 이분법적인 틀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 영혼이 독립되고 나아가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다. 로사와 영혜가 그랬듯이 목숨을 걸 정도로 외롭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소리 :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옮기면서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야규 마코토(柳生眞)

지난 3월 1일, 후카요 요코(深尾葉子) 오사카대학 준교수 댁에서 후카오 교수와 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 주간,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인 세분의 ‘영혼의 탈식민지화’ 대담이 이루어졌다. 저는 그 번역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먼저 이 대담에서도 후카오 교수가 강조하셨듯이 여기서 말하는 ‘혼’은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육신이 죽은 후에도 잔존하고 천당 또는 지옥에 가거나 윤회전생하거나 하는 그러한 어떤 ‘실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영혼의 식민지화와 탈식민지화와 관련해서 최근 일본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여당인 자민단의 여성 국회의원 T씨가 차 안에서 자기 비서를 구타하면서 “이 대머리!” “네가 얼마나 내 마음을 때렸느냐?” 등등의 폭언을 내뱉을 뿐만 아니라 마치 뮤지컬처럼 “네 딸을 차로 치어 죽여 놓고 ‘그런 뜻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외치는 음성이 미디어에 공개된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2012년에 의원에 당선된 이후 T의원 밑에서 일하다 그만둔 비서가 무려 100명에 달했다고 한다. T의원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지 못했던 비서가 그것을 몰래 녹취하고 미디어에 폭로한 것이다. TV 뉴스 때마다 흘러나오는 야비한 매도와 구타의 소리는 일본 대중들을 한심하게 만들었다.

T의원은 도쿄대학 법학부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후생노동성에서 관료로 일한 후 국회위원이 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었다. 여러 식자들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 이외에 허용되지 않는 유형·무형의 압력을 받아왔고, 그것이 “일류 엘리트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교만한 가치관을 내면화하여, 그것이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일 거라고 지적했다. 달리 말하면 T의원의 혼은 성장과정에서 엘리트지상주의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대담에서 후카오 교수는 ‘이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붕괴된다고 믿고 그것에 집작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식민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몸이 알아듣지 않고 병이 나타났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T의원의 경우는 자기 혼이 식민지화되어 있다는 자각도 없이 자기 혼이 느껴 온 억압을 비서 등의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비약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T의원의 모습이 근대 일본의 모습과 겹쳐진다. T의원이 오로지 초일류의 경력만을 지향했던 것처럼, 근대 일본도 오로지 부국강병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 세계의 일등국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을 위해 메이지시대의 엘리트들은 ‘국가신도’, ‘국체(國體)’, ‘신국(神國)’ 등 이름은 다양하게 불리지만 하여튼 “일본은 신의 자손인 천황가가 대대로 다스려온 둘도 없는 신의 나라요, 황실은 일본 국민의 종가요, 일본국은 그러한 황실을 모시는 일대 가족국가이다. 따라서 국민(신민)들은 마땅히 국법을 따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에도시대 이전에는 없었던)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먼저 일본국민의 혼을 식민지화시켰다.

이어서 류큐(오키나와) 사람, 아이누 사람을 동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대만, 한국에로 정치적인 식민지를 확대하고, 또 그 주민에 대해서도 혼의 식민지화를 강요한 것이다. 오키나와, 아이누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 수탈은 일본인 스스로가 권력자로부터 알게 모르게 받아온 억압을 더 입장이 약한 사람들에게 전가시킨 “억압의 이양”이 아니었을까. T의원이 비서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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