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을 사랑하는 마음연구소 소장 정학진

(동양일보) 정인희(鄭寅羲)는 구한말 청양현의 현감(군수)을 지낸 인물로 청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의병을 창의해 그 직을 사임한 것으로 ‘청양군지’에 짤막하게 기록돼 있을 뿐이다. 현직 군수가 의병을 창의하고 선봉장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사건이라 광복72주년을 맞아 여러 편의 역사적 근거와 당시의 지역 정황을 근거로 이를 정리해봤다.

1894∼1895년(고종 31∼32년) 청양군수로 재임한 정인희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및 단발령이 선포되자 항일정신이 충만해 의병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활동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이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 경무청에 유치됐다 한 달 만에 풀려나자 정 군수는 11월 29일 직접 청양의 채광묵(1850∼1906년)을 대동, 의병 180명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쳐들어간 장본인으로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민족의 혼을 일깨우며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의병의 선봉이 돼 홍주에 도착한 정인희는 청양의 안병찬·채광묵·이세영, 예산의 박창로 등 여러 유생들과 함께 거의에 대해 논의하고서 12월 1일 을미의병인 홍주의병을 주도하게 된다.

이날 저녁에는 청양의병 수백 명을 나그네와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홍주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이튿날 정인희의 명을 받은 청양의 이창서(1841∼1911년)는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의병을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해 그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고는 경무청을 부수고 들어가 그곳에 있던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구타하자 의병에 동참할 수 없다던 관찰사 이승우도 결국 승복, 의병에 동참키로 했다.

12월 3일에는 홍주에 김복한을 의병 총수로 하는 창의소를 설치하고 이승우를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으로 임명했으나 창의소 설치 하루 만에 이승우가 변심하자 다음날 모두 회군키로 했으나 오직 정인희 만이 공주를 공격하려 진격하던 중 정산전투에서 그만 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1895년 홍주의병은 사실 청양의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정인희 군수의 창의정신이 녹아있는 청양이 홍주의병의 본향이라 할 수 있다.

청양이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던 것은 충남의 서남부를 관할하던 금정찰방이 청양에 있어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점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이처럼 예로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구국의 일념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의에 과감히 맞서온 충절의(忠節義)의 서기가 깃든 곳이란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청양은 의병장 민종식이 어릴 적 정산에서 살았던 만큼 그의 연고지며, 그가 34세에 이조참판 벼슬을 내려놓고 1895년 정산으로 낙향한 것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한 면암 최익현 선생과 민종식이 항일운동의 거점지로 청양을 택한 것도 안병찬·채광묵·이세영·김덕진 등 청양지역 유생들의 항일정신이 의병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충북을 대표하는 제천의병의 경우 단발령을 강요하던 김익진 군수는 의진에 의해 도망가 버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청양의병의 경우 군수가 직접나선 의병의 본거지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을미·병오 홍주의병의 빛에 가려 그동안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청양의병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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