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장서 <수필가·보은문학회장>

 

나를 낳아 준 부모님 은혜! 평생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던 내가 이제 와서 다시 옛날을 반추함은 못 다한 자식의 넋두리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1952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글도 모르는 문맹(文盲)이었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했으니 음치(音癡)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일만 열심히 하시며,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살아간 두메산골 농부였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면 가끔 마당이나 마루에 앉아 나에게 학교에서 배운 노래 한곡 불러보라고 하셨다. 당신이 노래를 못 부르시니 자식도 애비를 닮아 노래를 못 부르는 음치는 아닌지 걱정이 되어 하시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 날도 아버지께서 나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 ‘각설이 타령’을 곱사춤과 함께 신나게 불렀다.

그때가 6.25전쟁 직후였으니 걸인들이 마을에 자주 나타났고 대문에 들어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던 장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시구 씨구 들어 간다 /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이놈의 신세 이래도 정승 판서의 자제요 / 돈 한 푼에 팔려서 팔도 유람을 나섰다 / 양푼 낯짝 실내기 목아지 하마 대가리에 매부리코 짓이기고도 오래 산다/ 얼~시구 시구 잘한다 절~시구 씨구 잘한다 / 품바하고도 잘 한다”

오래전에 불렀던 각설이 타령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버지, 어디서 났는지 지계 작대기로 내 등을 후려치시며 “에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 하시며 속상해 하시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이튿날도 말 한마디 없으셨고 며칠간 일을 나가시면서도 진지를 드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식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르래서 열심히 불렀는데, 왜 매질을 하실까?’ 그 때는 이해를 못했다.

애비는 글도 모르고, 노래도 못 부르는 것이 서러운 애비인지라, 애비보다 나은 자식이 되길 바라고 학교에 보냈더니 하라는 공부나 노래는 안하고 밥이나 빌어먹는 거지 자식을 만들고 싶지는 않으셨던 마음인 것을….

아버지께선 ‘눈 뜬 봉사’라며 글을 몰라 세금 고지서를 이웃 어르신께 물으러 가셨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선생이 되어 아버지께 글을 가르쳐 드려야지!’하며 다짐했다.

하지만 교사가 되고서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옥’과 ‘천당’, 이름 석 자 밖에 가르쳐 드리지 못한 불효에 항상 마음이 울적하다.

선생이 될 수 있는 사범대학을 다니게 되자 꿈을 이루게 됐다며 즐거워하시던 부모님….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 고작이다.

늦게 난 자식 행여 잘못될까봐 “베풀고 살라”며 욕심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문득 문득 생각이 난다.

취업지락(就業之樂)을 얻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지락(敎學之樂)도 맛보면서 가르친 제자들의 출람(出藍)의 소식을 들으며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가져보지만 자욕양(子欲養) 친부대(親不待)라는 말이 새삼 그리워진다.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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