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록 <칼럼니스트·예산>

 

군 제대 후 배낭여행을 떠났다. 45일간의 유럽여행에서 보고 듣고 또 만난 사람들, 그 모두는 이후 내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주일을 머문 파리는 더욱 특별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던 로마, 자존심과 전통이 살아있던 런던, 그 밖에도 물의 도시 베니스를 비롯해 수많은 유럽의 그 어떤 도시도 파리에 견줄 순 없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아!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구나’
그 기억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간단히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중년여인에게 햄버거 가게를 물었다. 그때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조롱을 가득 담아 되물었다. “당신은 프랑스에 맥도날드 먹으러 왔나요?”
그녀는 내게 프랑스의 자존심을 보여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오만하고 무례한 오리엔탈리즘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뿐이라면 파리는 내게 매혹적인 도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1월의 차가운 밤, 어렵게 찾아간 유스호스텔은 이미 사람들로 넘쳐나 자리가 없었다. 직원은 내게 가장 가까운 근처 숙소 주소를 적어줬다. 다시 전철을 탔다. 그런데 주소를 들고 찾아간 그곳엔 내가 찾는 번지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전철도 다니지 않는 차갑고 적막한 길가에서  노숙을 해야 할 처지가 된 그때, 어둠 속에서 젊은 연인 한 쌍이 다가왔다.
나는 그들에게 주소를 보여줬다. 잠시 메모지를 보던 그들은 내게 독일어를 하는지 물었다.
불어도 독일어도 못한다는 내 대답에 그들은 내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 참을 가던 그들이 갈래 길에서 멈춰 섰다. 어느 길로 갈지 잠시 고민하던 그들은 나를 숙소까지 안내해주고 나서야 자신들의 길을 갔다. 그들은 낯선 여행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길을 우회해준 것이다. 내가 파리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산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즐겨 인용했다.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보는 사람은 완벽하다.”
사이드는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또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도 없이 조국을 잃었다. 아무리 내가 새로운 정원을 가꾸거나 몸을 담을 만한 다른 공동체를 찾는다 해도 큰 위안을 받을 수는 없다.(중략)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 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그를 존경하지만, 그럼에도 하나 의문인 것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서 그가 느꼈을 고립감이 빅토르 위고의 자유로운 정신과 본질적으로 같을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영국의 고립(Splendid isolation)과 북한의 고립이 같을 수는 없잖은가.
그럼, 난 어디에 속할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내게 타향은 여전히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들을 때면 난 언제나 미국을 떠올린다.
그 멜로디와 가사가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오래되고 신비화되기까지 한 미지의 매혹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노래 속 그곳에 간다면 오래 전 잊을 수 없는 파리에서의 어느 밤을 떠올리게 될지 모르겠다. 결국 아름다움은 사람에게서 나오니까.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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