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근간에 예기치 않게 아팠다. 살다 보면 제 한 몸 간수하는 것조차 지난한 문제임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병마와 의연하게 대비한 채 맞서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일상적 건강수칙을 지켜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주변의 조언들도 귀에 딱지처럼 달라붙은 도덕경처럼 번잡하고 레토릭 같았지만 통증은 일상의 자유를 구속하는 우환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이후, 그때야 건강의 가치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우매하고 처연한 일이다. 이성으로 흠잡을 데 없는 선지자의 말보다 가시 박힌 손톱 밑 통증의 감성적 아련함이 더 절박한 존재가 인간 아니던가.

병원은 아픈 이들 천지다. 대형병원 입원실의 풍경은 병이 중할수록 무겁고 근심어린 표정들을 더 쉽사리 마주한다. 병원에 오래 있으면 없는 병도 생기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 생명보험회사의 보장범위에 드는 인간의 질병이 6천656가지라니 인간의 오장(五臟)에 있는 각각 81종의 병 중 마지막 '죽음'을 제외한 404종의 병을 일컫는 ‘사백사병(四百四病)’이라는 고사가 무색하다.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어느 날 찾아온 병마에 짐짓 태연한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란 보통의 내공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난 사실 병원 가는 일을 평소 게을리했던 위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두려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온한 자유를 속박당할 까봐 애써 무시한 것이라고 해도 타당하겠다. 중년의 나이에 전해 듣는 비보와 조문의 일상화 속에 습기처럼 번져오는 병환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몸이 내는 경고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못했다. 늘 허투루, 아픈 시간은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역경이라 생각했다. 결국 몸이 가르쳐 주었다. 내 몸을 치료한 오랜 친구는 세상의 모든 병은 죽을 때까지 재발되지 않을 뿐 어떤 병도 완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건강을 돌보라는 서늘한 협박일지라도 병들었던 몸은 촘촘한 관리를 수반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백세시대’를 찬미하지만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 수명 연장은 참으로 대책 없는 축복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더웠던 여름날 병원에 누워보니 어르신 환자의 간병을 두고 자식들 간의 날선 싸움들을 목도한다. 책임 공방이 오가기도 한다. 빛의 속도로 노령인구가 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국가도 개인도 절치부심 그려내야 할 이유이다. 몇 해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 연구소가 실시한 '죽음의 질 지수' 조사에서 조사대상 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보다 ‘죽음의 질 지수’가 낮은 나라는 멕시코와 터키뿐이었다. 우리 사회가 잘 살게 됐다지만, 여전히 우리 한국인은 너무 힘들게 세상을 떠나고 병환에 직면했을 때 가족 간의 분쟁은 여전히 가슴 아프게 많다. 아프지 말고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균열을 대비하는 처연한 책무가 되었다.

아프기 전과 후의 일상은 마치 긴 터널, 안과 밖의 명암 차이만큼이나 천지차이였다. 환자복을 갈아입는데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 아픈 이들은 왜 그토록 어둡고 무표정했었는지 온전하게 이해가 되었다. 아파 몸져 누워보니 나를 아끼는 씨알 같은 사람과 쭉정이 같은 사람도 자연스레 구별이 되었다. 아픈 것이 낫는다는 약속만 있다면 크게 아파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존재에 대한 온전한 성찰의 시간을 허락해 주는 게 통증이니 말이다. 통증이 주는 미학이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일만큼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없다. 통증 앞에 감당 못할 무기력으로 나약해지는 인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병이 들면 일상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또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도 많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운신에 제약까지 느끼면, 아픈 이의 존재는 더욱 작아진다. 타인의 고통에 우리가 더 귀를 열고 가슴을 열고 미덥게 마주해야 될 이유가 그것이다. 이 또한 통증이 주는 교감의 미학이다.

박노해의 시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민들레처럼’ 건강하게 살려거든, 부디 아프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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