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하 <예산고 교사>

어머니, 잘 지내시나요? 저도 어엿하게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살다보니 더욱 사무치는 이름이 바로 당신이군요.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심정을 헤아린다고 했던가요.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애지중지 소중하게 잘 키워 주셨는지 이제야 깨달은 못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2012년 혈혈단신의 몸으로 혼자 병원에서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저는 아이를 낳은 기쁨보다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목 놓아 펑펑 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가 옆에서 몸조리도 도와주고, 옆에서 수발을 들어주며 산모의 회복을 돕고 있을 때 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산후조리를 할 때도 어머니가 그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산모들처럼 곁에서 나를 보살펴주는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처음 낳아본 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옆에 계셨더라면 지혜롭게 아이를 양육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을 텐데 말이죠.

저는 결혼을 한 이후에도 힘든 형편에 산후조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4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며 일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봐줄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애를 맡겨가면서 돈을 벌어야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더욱 어머니 생각이 간절합니다. 평소 아기들을 예뻐하고, 생전에 “정하야, 나중에 네가 시집가서 애기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게.”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어머니 말씀이 귓가에서 맴돌곤 합니다.

늘 함께 하기에 소중함을 몰랐던 걸까요.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그저 응석받이 막내딸이겠죠. 하지만 제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키우던 시절에는 급식을 하지 않아서 매일 새벽 도시락을 두개씩 싸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소풍가는 날이면 꼭두새벽에 일어나셔서 직접 김밥을 말아 예쁘게 담아주셨습니다. 그냥 용돈이나 쥐어주며 아무거나 사 먹으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학교생활 12년 동안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는 김밥이나 초밥을 정성스럽게 싸주셨죠. 어머니가 저를 키우던 시절에 우리 집에는 그 흔한 세탁기 한 대가 없어서 교복을 손수 빨아주었습니다. 여름은 그렇다고 쳐도, 겨울엔 찬물에 손 담구며 교복 세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손세탁을 물론이요 친구들 앞에서 주눅들지 말라며 항상 교복 셔츠를 새 것처럼 다려주셨습니다. 자가용이 없어서 버스로 통학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행여 딸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걱정하시며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저를 기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직도 친정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하거나 사우나를 함께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 당신이 그립습니다. 손주 재롱에 웃음 지으시고 용돈도 쥐어주시는 주변의 할머니들을 보면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저는 생전에 어머니에게 어떤 딸이었나요?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친구 같은 딸이긴 했던가요?

엄마 없는 설움이 어떤 건지 제 나이 사십 줄에 접어드니 알 것 같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올 리 없겠지만, 꼭 한번만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를 이제는 제 품에 고이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키워주시느라 수고했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진심을 담아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 제가 받은 사랑을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드릴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매해 돌아오는 어머니의 기일이면 그 사랑의 무게만큼이나 책임감이 더해집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것이고, 그래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맘뿐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생전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이제는 매 해 되뇌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로 살아주셔서, 그리고 저를 어머니의 딸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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