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공원 입구에 내걸린 안내문. 음란행위 금지 표지가 아니라 작업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이다. 주체와 객체를 바꿔 표절시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쿠바인의 발상은 신선하다.

글 쓰는 이에게 표절 시비는 목의 생선 가시다. 그런 걱정 따윈 접어두라고, 글파라치 따돌릴 소품이 넘쳐난다고 떠든 누군가의 말만 믿고 캐리어를 챙긴다. 줄친 곳을 나의 영토라며 땅땅거리고 싶은 본능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색감부터 다른 문을 꿈인 듯 열고 들어선다. 시가향기 면사포가 풍경화에 드리우는 순간 굳었던 뇌가 초콜릿처럼 녹는다. 그럴 때 스트레스 호르몬 코티졸이 마구 솟아나고, 까닭 모르게 손끝이 가려워 키보드에다 낯선 풍경을 그려나간다. 신들린 듯 그린 그림은 왠지 낯설지 않다. 전생에 여기가 고향이었나. 아득한 기억 너머에 닿은 묘한 설렘이 몇 페이지 악보로 모습을 바꾼다. 카랑한 차랑고 매기는 소리 따라 저음의 타르카가 받는 소리로 화음을 맞춘다. 선율 따라 다다른 곳은 혁명광장 호세 마르티 동상 앞이다. 지나치게 강건체다 싶을 때면 바다를 낀 살사 클럽으로 장소를 바꿔도 좋다. 몸 흔들며 노래 부르다 목이 마르면 코히마르로 간다. 노인과 바다의 캐릭터 푸엔테스가 건네는 야자열매로 목을 축이기 위해서다. 거기엔 헤밍웨이가 남겨둔 문화재급 단어들도 곳곳에 박혀 있다. 닦은 알곡들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단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반짝인다.

표절 시비의 종결판인 뒷골목, 꼴렉띠보 택시를 타려고 열 댓 명 물라토 틈에 끼어 서성거린다. 덥고 짜증스런 표정을 읽었는지 앳된 쿠바나가 내게 다가온다. 원피스, 하이힐에다 얼굴까지 검은 색으로 깔맞춤한 그녀가 무작정 키스하라며 뺨을 내민다. 무슨 짓인가 싶어 옆으로 피한 순간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짜증난 투로 꼬레아에서 왔는데 왜? 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키스를 해야 한다며 입술을 갖다 댄다. 왜 그러느냐고 몸을 뒤로 젖히니 새카만 손으로 높다란 빌딩을 가리킨다. 건물 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는 뜻이다. 거긴 쓰다버린 콘돔이 버려져 있던 새벽 산책길이다. 순간, 몸에 달린 게 툭 떨어져 나가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손을 내저을 무렵 또 한 대의 꼴렉띠보 택시가 도착한다. 방향이 다르더라도 무조건 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다급하다. 열어준 문으로 다짜고짜 몸을 밀어 넣고 앳된 여자를 살핀다. 별스럽다는 듯 눈을 흘긴 뒤 표정을 고친 그녀는 헤밍웨이 닮은 남자에게 다가간다. 피에 맛들인 거머리는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다.

위기 탈출 미션을 성공한 뒤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다. 거기라면 호젓해서 호객꾼이 없을 것 같다. 한숨 돌리려 한 순간 저만치 선 물라토가 지금 몇 시냐고 고함쳐 묻는다. 이럴 경우 모른 척 하면 신사도를 의심받는다.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혹시 꼼수가 감춰져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다잡는다. 험상궂은 물라토 고함소리가 뒤통수를 연신 두들긴다. 한 블록 뒤로 급히 몸을 숨긴 뒤 숨을 고른다. 그때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물라토 한 명이 톡 튀어나온다. 축지법을 써서 다시 나타난 물라토는 표정을 싹 고치고서 활짝 웃고 있다. 검은 사람을 바꿔놓으면 분간이 어렵지만 벌어진 윗니 때문에 들켜버린 건 모르나 보다. 반짝거리는 동전을 쥔 물라토의 손을 자세히 살핀다. 코인 수집에 관심이 많아 글씨를 읽어보려는 뜻이다. PATRIA O MUERTE.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짧은 글에 담긴 의미 때문에 소유욕이 눈동자에 드러났을까. 체 게바라가 각인된 코인을 내민 그가 1달러와 바꾸자고 꼬드긴다. 독심술까지 공부한 물라토는 물정 모르는 걸 노려 일곱 배 바가지를 씌우는 거다. 잘 사는 나라에만 업그레이드 단어가 있다고 생각한 건 쿠바를 얕잡아 보고 하는 소리다.

1모네다 가치의 물건을 1달러로 사야하는 관광객. 24진법에 적응이 되어 갈 무렵엔 난데없이 환율이 바뀌기도 한다. 또 한 블록 안쪽으로 접어들면 집 한 채 넓이의 공원이 나타난다. 거기엔 붉은 색 19금 포스터가 걸려 있다. 얼핏 보니 공공장소에서 사랑을 나누지 말라는 경고문 같다. 활자 중독 탓에 자석에 끌린 듯 다가가 글씨를 읽어본다. 예상했던 것과 딴판으로 ‘작업 중이니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내용이다. 주체와 객체를 바꿔서라도 여행자 시선을 끌겠다는 수사법은 호세 마르티가 가르친 것 같다. 외세의 돌이 굴러와 원주민의 돌을 빼 버린 역사가 오롯이 간직된 곳, 여기서도 낯설고 비틀린 문장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작가 자격을 내려놓으란 뜻인가 보다. <계속>

김득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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