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연휴 땜에 피난 온 호텔 빠사까바요. 넓푸른 수영장과 야외 공연장이 창 너머 어른거린다. 반대편엔 코발트빛 해협이 세이렌의 치렁거리는 머릿결처럼 투숙객을 유혹한다. 바다 건너 적막에 싸인 섬에서 썸남썸녀가 돼 보잔 뜻일까. 돌로 쌓은 성벽 속 몽환에 가려진 세상은 꽃잠 수놓기에 그저 그만이다. 

우뚝 솟은 아파트를 성이 들여다보이게 지은 건 안에서 벌어질 일을 예견한 것 같다. 화물선이며 유람선도 뱃고동을 울려 엉뚱한 궁리 따윈 하지 말라 경고를 보낸다. 출근 시간이면 통통배 한 척이 성 안의 사람들을 육지로 실어 나른다. 섬에서 출발한 배가 육지에 닿기까지 얼마나 걸리나 시간을 재 본다. 정확하게 2분. 그것도 바닷물 흐름을 거슬러 휘어진 항로를 택한 탓이다. 좁다란 해협에 연육교만 놓인다면 세이렌의 계략이 모래성으로 변할 텐데 교육, 의료, 농업에 들일 돈 땜에 여력이 없나보다. 

밤 깊은 좁다란 해협, 풍경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바뀐다. 섬 곳곳에 설치한 간접 조명이 동그란 건물을 허공에 붕 띄우고, 시엔푸에고스 하울의 성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풍경화에 몰입하면 누구나 소피처럼 마법에 걸려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 같다. 지레 겁먹지 말라는 듯 화물선 한 대가 지나가고, 배가 일으킨 물결 위에 별빛의 군무가 채워진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인어의 늘씬한 몸매를 더듬으면 세이렌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때 인어의 유혹에서 벗어나라며 고장 난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브리가다 캠프에 참가한 대원들의 쿠바 사랑이 담긴 인증샷을 찍고 있다. 무늬만 호텔인 이곳에서 수건 한 장 없어졌다고 삼백 명을 한 시간 넘게 붙들어둬도 저렇게 즐겁기만 하다.

언제 날이 밝은 걸까. 퍼뜩 정신 차려 밟고 선 곳을 둘러본다. 간접 조명 불빛엔 그림 같아 뵈던 빠사까바요가 무늬만 호텔이라니. 방마다 모기가 득시글거리고 나사못 빠진 샤워기 걸이가 바닥에 나뒹군다. 캠프나 마찬가지로 수압이 약해 비눗물 지우려면 손으로 박박 문질러야 한다.

 커튼 아래쪽은 7부 바지 입혀 놓은 듯 플라스틱 판자로 엉성하게 막아 바람이 무시로 들락거린다. 군화도 뚫는다는 모기에겐 화물선 스쳐가는 해협처럼 보일 게 틀림없다. 호텔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미니바는 나무틀만 간신히 남겨져서 없는 것보다 있는 걸 나열하는 게 빠를 정도다. 비누 한 개, 수건 두 장을 갖춰 놓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호텔에서 떠나는 날 아침, 인솔자가 대원들을 불러 모은다. 주차장엔 버스 일곱 대가 시동을 걸어두고 기다리고 있다. 모이라는 시간에 늦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어서 버스에 탔지만 자리 몇 개가 비어 있다. 소주랑 같은 값의 럼주를 밤새 마셨거나 화장이나 의상에 별스레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때 배를 움켜쥔 일본 학생이 눈을 감은 듯 더듬거리며 버스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일본팀에게 왜 저러냐고 물으니 배탈이 난데다 콘택트렌즈까지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 땜에 일곱 대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건가. 학생이 버스에 오른 뒤 오토바이를 앞세운 대열이 주차장을 벗어난다. 하지만 백 미터도 못 가 버스가 멈춘다.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어느 누구도 까닭을 얘기해 주지 않는다. 맨 뒷자리에 앉은 나는 섬에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가 오가는 간격이 얼마인지 다시 시간을 재 본다. 2분 거리의 해협을 건너오려고 이십 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배는 네 번 쯤 왕복했을 것 같다. 소변을 봐야겠는데 호텔로 돌아가기엔 날도 덥고 멀기도 하다. 버스에 탄 대원들 눈치를 보며 선착장 내려가는 계단 근처로 다가간다. 콘크리트 담장 너머 몸 하나 가릴 곳이 눈에 띈다. 그러는 동안 여자 몇 명이 줄 지어 호텔로 향하고 있다.     

한 무리의 여자가 버스로 돌아오고, 선착장을 내려다보거나 와이파이 터지지 않는 폰을 습관처럼 들여다보다 낙심한 대원들이 버스에 오른다. 이젠 떠나려나 싶었던 버스는 오히려 시동을 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태블릿을 켠 나는 방탄소년단의 춤과 노래에 빠져든다. 시간 때우기엔 템포 빠른 노래며 춤보다 좋은 건 없다. 푹푹 찌는 버스 안에서도 동영상 빵빵하게 채워둔 태블릿이 있어 마냥 흥겹다. 며칠 사이에 쿠바 사람 다 된 것처럼, 버스 일곱 대를 무턱대고 대기시켰는데도 따지는 사람 하나 없다.

 혹시 다친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소녀시대, 시스타의 노랠 듣거나 멍 때리거나 졸았던 것 같다. 한 시간 넘게 지났을 무렵 인솔자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제각각 시간을 때우던 대원들이 버스에 오르는 그를 지켜본다. 앞에서 뒤로 전해진 얘기는 어처구니없다. 체크아웃 하던 중 어느 방의 수건 한 장이 사라진 걸 알았다는 거다. 공산품 귀한 곳이라지만 달랑 수건 한 장 때문에 삼백 명 대원들 발이 묶였다는 사실이 뜬금없다. 상식이라곤 통하지 않는, 육십 년 전 타임캡슐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이곳이 바로 쿠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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