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인문학 강의를 하며 만나는 학생들에게 뜬금없지만 정중한 모양새의 질문을 간혹 받는다. 가늠하기 어려운 고단한 일상 속에서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화시켜주지 못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현학적 강의 탓이겠지만 “삶의 철학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라는 그들의 사뭇 진지한 질문에는 늘 상 뭐라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이른바 좌우명이라 일컬어지는 삶의 철학이란 것이 ‘이거다’라고 정의 내릴 것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분석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가 외부환경에 연동하는 유연함을 지니고 있음을 나 또한 굳게 믿는지라 이러한 질문은 매우 곤혹스럽다. 강박적 삶의 원칙이 많지 않을수록 일상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에 나름 부응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좌우명이라든가 삶의 철학 같은 명문화된 의식의 규정 같은 것이 있으면 삶은 그만큼 제약을 당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련의 과정을 용해할수록 삶의 관점은 넓어지는데 소싯적 좌우명이었던 ‘원대한 희망을 품고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식의 추상적이며 동화적이기까지 한 화법으로 중년의 자신을 애써 포장하고 싶지도 속박하고 싶지도 않다. 굳이 어찌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애써 답을 한다면 ‘사람 향기 나게 소신 있게 살자’ 정도로의 방향성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가공된 표현을 하자면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물질과 세속에 덜 흔들리는 존재로서 주관 있게 인생을 살아내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상에서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비이성적 일들에 대해 속절없이 휩쓸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는 다른 민족과 달리 집단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으로서의 ‘나’보다 집단으로서의 ‘우리’를 중시하고 그 속에서의 관계 욕구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집단 내 관계 욕구 수준이 높다 보니 ‘소신’보다는 집단 의견에 순응하며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 처세임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아 간다. 그것이 사회화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분위기지만 그건 개량화된 현실 순응일 뿐이다. ‘소신’을 피력하는 개인의 존재가 집단에 위배된 개인주의로서 치부되고 존중받지 못했을 때 그에 따른 개인의 좌절감은 상대적으로 크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개인으로서의 존재의 가치는 집단주의에 의해 점차 유실되어간다. 개인의 ‘소신’이 존중받고 물질에 오염되지 않는 인간관계를 보장해주는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고민, 상실의 시대에 시급하다.   

일본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자행된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로 기술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소신’의 바이블이다. 이 책에 대해 퍼부어지는 일본 내 극우파들의 비판에 대해 하루키는 담대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아니다. 오직 나의 ‘소신’뿐이다. 비록 사회적 평판이나 인기를 잃더라도 지켜야 할 목소리 그것만은 잃지 않을 테니까”, 반성 없는 군국주의의 국가적 망령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지탱하는 그의 지성과 양심적 ‘소신’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루키의 ‘소신’을 보며 충돌과 갈등이 부담되어서 비루하게 정의를 피해 갔던 지난날의 아니 어쩌면 지금도 진행형일 수 있는 굴절된 유연함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강하면 부러지는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 올바른 처세라 단 한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타협적 생각들은 사실 ‘소신’의 상실이었다. 생각과 행동의 괴리, 모든 차별에 반대하면서, 막상 나에게 그런 차별이 일어나면 정면 돌파를 피하던 말갛던 존재의 민낯이 처연해졌다.  
 
‘소신’ 있는 삶을 살려면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생활 속 민주주의를 몸소 실현해야 된다. ‘소신’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면 집단에 기대어 이론과 선언의 그늘에 있기보다 정의롭지 않은 현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일자리를 마련한다고 획일적 사회문화와 집단주의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상식적 바탕 위에 ‘소신’ 있는 이들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아니면 제대로 된 시민사회는 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소신’ 있는 개인의 삶을 사회 각 단위에서 존중해주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일상 속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소신’은 모난 돌이 아니라 그 사회 민주주의, 건강함의 척도이다. 다시 하루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서의 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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