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와 피 튀기도록 싸우던 중 공연장 갈 사람들 나오라고 불러댄다. 모기 한 마리를 넉 다운시킨 뒤 2층 침대에서 내려간다. 문을 나서다 멈칫, 바람막이 꺼내려고 캐리어를 뒤진다. 덥고 습한 캠프와 달리 버스며 공연장 에어컨 땜에 감기 걸릴지 몰라서다. 미니버스에 탄 사람들은 탈주극을 벌이는 듯 긴장 모드다. 에어컨으로 샤워하는 동안 버스는 아치형 트로피카나 네온사인 아래로 파고든다. 수영장 넓이의 정원엔 나트륨 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다. 버스 문을 연 인솔자 에르네스토가 어디론가 달려간다. 잠시 후 그가 입장권을 펴 들고 ‘바모스’ 라고 고함친다.

 어둠의 꼬리를 잡은 일행들이 그를 뒤따른다. 바람막이를 벗는 잠깐 동안 야속하게도 어둠이 나와 일행들을 떼 놓는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둠 속에서 새까만 에르네스토가 환생한다. 내 옷차림을 살핀 그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왜 반바지를 입고 왔느냐, 그런 차림이면 입장이 안 된다.’ 사원이나 기념관도 아니면서 반바지 차림은 안 된다는 게 어이없다.    

뒤이어 몇 대의 버스가 관광객을 차례로 토해낸다. 피부색이며 언어는 제각각이지만 반바지 입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버스 시동이 꺼진 정원이 다시 암막 커튼을 드리운다. 에르네스토는 어디로 간 걸까. 긴장성 방광 위축증이 도져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릴 무렵 나타난 에르네스토. 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세 사람이 바삐 일하는 사무실이다. 

내 반바지를 가리킨 그가 직원과 한참동안 얘길 주고받는다. 스모 선수 덩치의 직원 표정엔 짜증이 켜켜이 쌓였다. 그는 옷걸이에 걸린 커다란 바지를 벗겨 내게 훌쩍 던진다. 바지를 몸에 대 보니 아기에게 걸친 코트 꼴이다. 난감해하는 나더러 에르네스토가 빨리 입으라며 윽박지른다. 반바지 위에 껴입었는데도 몸 하나 더 들어갈 만큼 여유가 있다. 허리띠로 얼기설기 졸라맸지만 꼴이 말이 아니다. 

아랫단을 두 번 접어 올린 뒤 엉기적거리며 입장한다. 중앙 무대는 테니스 코트 세 개를 붙인 만큼 넓다. 작은 무대는 중앙 무대 양 옆, 열대 식물이 빼곡한 계단을 따라 꾸며져 있다. 꽃만 해도 눈이 시린데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 파라다이스가 이럴까 싶다. 풋살 경기장 면적의 관람석은 이미 자리가 꽉 채워졌다. 고막 때리는 음악을 신호로 머리보다 크고 화려한 화관을 쓴 무희들이 흑인 남자들을 이끌고 등장한다. 남녀 무용수가 어울려 펼치는 춤은 텔레비전에서 본 어떤 쇼와도 비교할 수 없다. 배, 허리, 어깨가 따로 노는 춤을 지켜보는 동안 어깨의 날개를 휘저어 하늘로 날아오르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한다.

 춤을 곁들인 연극도 몇 차례 이어진다. 채찍 든 남자가 헐벗은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걸로 봐서 노예의 고단했던 삶을 드러낸 연극이다. 그걸 보는 동안 조마조마했던 일들이 서서히 잊힌다. 몰입하다 보니 헐렁한 바지 생각도 지워진다. 춤과 연극이 끝나고 무희들이 줄 지어 무대 아래로 내려온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팔을 잡아당긴다. 누구에게 지시받은 건지 윙크를 건네며 사진 찍자고 유혹한다. 그 땜에 잊혔던 핫바지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객석을 돌아다니던 무희들이 사라지고 어둑하던 무대가 밝음을 되찾는다. 어딘가 숨었던 사회자가 가운데로 나와 각 나라 관객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느지막이 호명되어 무대로 나가던 야마나카가 꼬레아도 불러내라며 소리친다. 그때서야 사회자가 마지못해 ‘꼬레아 수르’를 부른다. 바지춤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선 내가 무대에 오른다. 앞줄의 남녀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춰 율동을 시작한다. 각 나라 대표들이 그들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헐렁한 바지에다 몸치인 나도 스텝 맞추려 애써 보지만 꼬이는 다리는 어쩔 수 없다. 엇갈린 춤을 추느라 땀 삐질삐질 흘리는 사이 음악이 멈춘다. 

곧이어 나라별 댄스 경연이 있다고 사회자가 알린다. 팀을 이룬 사람들이야 별 문제 없지만 달랑 혼자인 나는 난감하다. 몸치인데다 스텝 꼬이는 바지 입고 뭘 하란 말인지. 내 차례가 되니 싸이의 강남 스타일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사회자가 나를 무대 가운데로 떠민다. 핫바지를 입혀 음정 박자 엉망인 쇼를 한 나. 철저하게 망가진 모습이라야 관객을 제대로 웃긴다는 걸 증명해 보인다. <계속>
 

고궁이나 기념관처럼 반바지 차림으론 입장할 수 없는 트로피카나 공연장. 핫바지를 빌려 입고 강남스타일 춤을 어설프게 선보여스스로를 망가뜨린 나. 그래야만 관객을 제대로 웃긴다는 시범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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