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옥 <충북도의회 의사담당관·수필가>

더위가 가시며 일교차가 커지기 시작한다는 처서가 지나고나니 물러가지 않을 것처럼 작열하던 한여름도 서서히 가을에게 문턱을 내주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들바람으로 다소 마음에 여유가 생겨 과거의 추억에 젖어 보기도 한다.

오랜 공직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생각이 난다. 모범적인 언행과 가르침으로 늘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주시던 분이다.

그 분은 내가 공직생활에 들어와서 처음 함께 근무하셨던 직속 상사이다.

수기로 제증명을 발급해 주던 그 시절 수려한 한문의 필체처럼 흑백이 명백한 카리스마 속에 후덕한 인품으로 사회초년생에게는 따뜻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오래된 동료에겐 친근한 형처럼 사람이 사는 맛을 느끼게 해주시던 분이다. 또한 업무추진 면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료를 대하는 행동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셨다. 매사 꼼꼼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신규직원이었던 나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주던 모습이 꼭 온화한 서당 훈장님 같았다. 작은 실수는 웃음과 묵언으로, 잘못한 부분은 따끔한 훈시말씀으로 깨우침을 주시고, 어렵고 힘들어 하면 손수 일을 덜어주며 온몸으로 온화함을 실천하던 황희정승 같은 분이셨다.

주변의 많은 직장 동료들뿐 만아니라 주민들과도 스스럼없는 대화가 오갈만큼 격의가 없었고,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을 상담하러 오면 열일을 제쳐두고 끝까지 경청하며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 또한 나이와 상관없이, 돈이 많거나 적거나,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를 따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늘 아버지 같이 훈훈하게 다가왔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몸이 허약했던 내가 연가를 다 사용하고 부족할 때에도 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주셨다. 그 무렵 대민업무 추진으로 이석하게 되면 옆 직원이나 업무대행자가 반드시 있어야 되었기에 여간 민망하고 어려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업무대행을 자처하면서까지 쉴 수 있도록 배려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업무가 폭주하던 그 시절 새벽에 출근하고 늦은 밤 10시나 11시경에 퇴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면 출근하고 한 10시경 힘들 때 즈음 당직실에서 쉬도록 해주었고, 오후 4시경쯤 되면 에누리 없이 쉬도록 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쉴 수 있는 휴게실이 없었기에 당직실에서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죄송해서 고집을 피울라치면 오히려 역정을 내면서 쉬도록 강요를 할 정도로 가족처럼, 딸처럼 대해주셨다. 아픈 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 동료들에게 남다른 배려와 따스한 온기로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 분이 계셨기에 건강을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요즘 언론 상에 떠들고 있는 ‘공직사회 먹칠하는 공무원들 도 넘었다.’, ‘끊이지 않는 비위... 부끄러운 00시 공무원들’, ‘공직기강 무너진 00시’, ‘무정부 상태 빠지나’ 이런 보도를 읽으며 같은 공무원으로서 부끄러움이 깊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한 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물을 흐린다고 몇몇 공무원들의 행태로 인해 공직사회 전체가 욕을 먹고, 공무원 전체가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져가고 있다는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무섭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대다수 공무원들은 올바른 사고와 곧은 행동을 하고 있다. 앞서 예를 든 잊을 수 없는 나의 상사가 계셨듯이 그와 같은 많은 선배공무원들이 있었기에 공직사회가 면면이 이어져 온 것이고, 또한 청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사회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감동이 있고, 따뜻한 온기가 살아있으며, 무너진 공직사회가 아닌 올바른 공무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지해 주는 뒤에는 신규공무원시절 나의 롤 모델이 되셨던 그 분이 계셨기에 38년 동안 별무리 없이 근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즘 우리사회를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도덕이 상실되고, 예의가 무너진 사회라고 한다. 질시와 반목, 배타적인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 또한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공직사회는 도민들을 위한 신뢰, 동료들을 위한 배려가 법과 제도 속에서 정의롭고 따뜻한 온기로 피어나고 있음을 자각해 보며 내게 따뜻한 온기를 주셨던 계장님을 이 가을에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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