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별로 새로울 것도 전문적인 것도 없는 내용으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침 튀기는 이른바 전문가들과 비교해 볼 때 마광수의 삶은 기억될 만한 가르침과 숙제를 남기고 간 사람으로 판단된다.

비록 그가 패거리 문화 즉 집단 폭력 - 동료 교수들과 文壇의 왕따, 책도 안 읽으면서 변태나 정신병자로 매도하는 대중들의 비난 - 을 버텨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생각할 것들을 남기고 가는 삶은 그 내용이 철학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삶은 의미와 가치가 있지 않을까.

마광수가 남긴 숙제는 아마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것과 함께 예술의 사회적 의미나 역할에 대한 것일 수 있다. 美연방대법원의 음란과 외설로 기소된 레리 프린트에 대한 무죄 평결문(미국헌법 1조의 정신은 ...(중략)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전부 들어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한국 대법원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에 대한 유죄 결정(자유분방하고 괴벽스러운 섹스행각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문예성, 예술성, 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 완화의 정도가 별로 크지 아니하여)이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미국의 경우 대중의 지적 능력 즉 시장의 기능에 대한 고려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좋고 나쁜 의견의 판단이나 기준은 변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근거한다는 깊은 뜻이 내재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수 천년 동안 된장고추장 등을 중심으로 단백질을 섭취하면서 수많은 전쟁과 위험을 견디어낸 것과 서구의 소, 양 등 육식위주의 식단처럼 문화적 맥락에서의 의미 차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고 내가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늘 내가 옳은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보편적인 公理라는 면에서 본다면 바다의 동서 차이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바로 표현의 자유가 아닐까.

사실 20년 전에는 SNS도 없었고 오로지 신문과 방송이 주는 일방적인 메시지만을 소비했던 시절이라 부적절한 메시지에 대한 노출에 대한 거부감 혹은 면역체계의 작동이 지금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원칙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는데 이른바, 실질적인 음란왕국 대한민국에서 마광수 식의 표현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일로 판단한 대법원의의 결정에 대한 반성과 평가 등등은 우리 사회의 숙제가 아닐까. 해서 학부모나 교사 등에 의하면 초등학생들 조차도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하는 이 시대에 진짜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 보다는 반성 즉 自省에 대한 지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래 전 서울대학 언론학과에서 대중문화론을 강의하던 강모교수가 가수 신해철을 초청해서 특강을 열었는데 많은 교수들이 반감을 가졌다. 한때는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에 대중예술을 하는 즉 나훈아나 인순이(존칭 생략)같은 예술인들에게는 대관을 불허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최근 부산, 서울 등지에서 벌어진 청소년폭력사건의 피해자인 중 한 여중생이 온몸에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동영상을 보면서 느낀 첫 번째 생각은 왜 무릎을 굻고 있는 것일까 이다. 선배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은 것이 저런 처벌을 받을 만큼 큰일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마광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랜 침묵. 마광수라는 90년대의 문화아이콘이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많은 시간이 아니 더 많이 사회가 바뀌어야겠지만 혹시 그 당시에 나 역시도 장미여관을 이러저런 목적으로 지나다니면서(집이 없던 시절이라)침묵하고 외면하는 공범자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불편하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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