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책 한권 (3) - 아Q정전

▲ 근대 중국인 작가 루쉰(魯迅)의 ‘아Q정전’을 주제로 한 좌담회가 지난 5월 19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렸다.(왼쪽부터) 김용환 충북대 교수, 이선옥 충북대 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가 좌담을 펼치고 있다.


 ■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1920년대 중국사회 풍자한 중편소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자화상

 ■ 김용환 충북대 교수
 중화사상에 영혼 식민지화된 상황속
 실존적 자각없는 개인 통렬히 비판
 ■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루쉰 작품속 인물들 비독립·비주체적
 영혼 탈식민지화 실현 위해 저항 강조
 ■ 이선옥 충북대 교수
 중국문학사 첫 민중언어로 쓰인 작품
 그 이전 문학은 민중 생활 감각 희박

 

동양포럼(운영위원장 유성종)은 근대 중국인 작가 루쉰(魯迅)의 ‘아Q정전’을 ‘잊을 수 없는 책 한권’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로 선정, 책에 담긴 그 뜻을 함께 살펴보기 위해 지난 5월 19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좌담회를 열었다. 이날 좌담에는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이선옥 충북대 교수가 참석했다. 좌담회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저 자신이 개인적으로 루쉰의 아Q정전과 만난 것은 197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중국계 미국인 교수의 소개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아주 뜻 깊은 사건이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알제리아계 미국인 교수로부터 프란츠 파농(Frans Fanon)의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es de la Terre)을 소개받았는데 그 두권의 책이 나중에 일본에서 공공하는 철학대화 활동을 전개할 때 정치·경제·법률 등의 차원에서 거론됐던 식민지화와 탈식민지화의 문제가 문화·예술·종교의 분야에도 파정되고 마침내 인간내면의 의식과 무의식에까지 연관되어 격렬한 논쟁거리가 됐을 때 여러모로 크게 도움이 됐기 때문에 아주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Q정전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 저 자신이 개인적인 체험·경험·증험·효험의 과정을 통해서 체감·체득·체인했던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한마디로 영성해방-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중시하게 된 원초적 계기가 되었던 책이기에 저에게는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김용환 교수님부터 말씀해주십시오.”

▷김용환 충북대 교수 “‘아Q정전’은 근대 중국인 작가 루쉰(魯迅·1881~1936)의 작품입니다. 그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사상가입니다. 루쉰 고향 소흥은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의 중심 영향권에 놓여 있었는데 그 영향을 받은 루쉰은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고자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학구국을 목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소위 ‘환등기 사건’을 겪게 됩니다. 세균학 시간에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국인 군중의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 루쉰은 민중의 육체적 질병보다 민족의 정신적 병환을 치료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의학을 중단하고 문학으로 전향했습니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이후 1918년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1918년에 발표했습니다. 이는 중국에 신문예를 탄생시키는 서막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인일기는 봉건주의 제도의 모순 속에 갇혀있는 국민들의 상황을 식인사회에 비유하고 이에 대한 개혁의지를 광인으로 설정하여 현실 인식과 각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작품입니다. 광인은 잠들어있는 중국 사회를 일깨우기 위한 희망의 상징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불합리한 의식에 대한 절망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루쉰이 느끼는 희망과 절망의 감정은 광인의 고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독자들로 하여금 희망과 절망의 파토스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중국인들의 국민적 성격의 전형을 풍자한 중편소설, ‘아Q정전’을 발표했습니다. 역사적 유물인 중화사상에 영혼이 식민지화되어 스스로를 기만하여 사는 우매함과 취약함을 아Q라는 인물에 투사하여 냉혹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아Q는 청조말기 봉건사회를 살아간 날품팔이 노무자로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소위 정신적 승리법이라는 것으로 소화해버리는 일종의 ‘자기합리화’로 버티면서 살았습니다. 아Q는 매사에 자신 있게 처신하였고, 승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Q가 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 첸 가의 아들을 찾아간 날 밤에 자오 씨가 습격을 받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Q는 자오 씨의 집을 습격한 장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체포를 당합니다. 아Q는 난생 처음 붓을 들어 서명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렸고 얼마 후 그는 무수한 인파에 둘러싸인 채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루쉰은 이러한 공허한 영웅주의 기법으로 영혼의 식민지화 상태를 그리며 현실을 직시 못하여 자기만족이라는 환상에 매달림을 비판했습니다. 이처럼 아Q에게 나타난 중국 국민의 열등성은 우매함과 마비된 노예근성이었습니다. 루쉰은 문학이라는 고독한 소리를 통하여 그의 내면의 절망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증오했던 것은 상전에게는 굴복하고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상전이라면 무조건 굽신거리는, 자아의 존재감마저 상실한, 중국적 ‘평균인’들인 것이죠. 개개인 정신의 멍에와 외세, 또 다른 굴종의 매커니즘이 오고 있는데도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평균인들의 모습을 ‘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주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는 첫 작품이 바로 ‘광인일기’입니다. 광인은 중국 사회를 일깨우기 위한 희망의 상징이고. 불합리한 의식. 무조건 굽신거리는 의식에 절망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아Q정전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겠지만 영혼이 식민지화 상태에 있음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참으로 비참한 영혼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 같습니다. 아Q가 난생처음 붓을 들고 싸인 하는 표시인 동그라미 들고 자기 죽음인 줄도 모르고 멋있는 일처럼 하고 있는 모습,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조차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공허한 영웅주의나 우매함이 결국 노예근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예근성은 중국 사회와 연동된 것이지만 중국 사회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영혼의 차원에서 실존적 자각이 없음에 대한 통렬한 외침인 것입니다. 루쉰에 나타난 일관된 태도는 절망 속에서 생명의 존재가치를 일관되게 찾는 것이었습니다.”

▷김 주간 “제가 중국에서 공공하는 철학대화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베이징 대학교수로부터 김태만 교수의 박사논문이 루쉰에 관한 것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김태만 교수가 루쉰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냈다는 이야기는 들은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원래 루쉰에 관한 문제관심과 연구천작에 힘을 기울였던 것을 회생시킨다는 의미에서라도 아Q정전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을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김태만 한국 해양대 교수 “말씀하신대로 박사논문도 그랬고 그 후에도 루쉰을 손에서 놓았던 적은 없었지만 제가 루쉰 연구자였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 나름의 루쉰관이나 아Q정전에 관한 견해는 늘 있었습니다. 루쉰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 형상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은 없고 늘 타인의 생각을 빌려서 갈아가는 비독립적이고 비주체적인 사유방식을 심각하게 노정하는 인물들입니다. 관료나 민중은 물론 일부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자기사고나 행동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이 원천적으로 망각 또는 제거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억압과 굴종 그리고 부자유가 의식과 체질에 배어있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를 ‘국민성 개조’ 또는 정신혁명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논의해왔었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식민성 개조’ 즉 ‘탈식민주의’ 운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주의나 식민성이 제국의 식민지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체험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상실된 마비된 인성과 의식의 심층에 더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성’은 다양한 층위로 발현합니다. 박약한 주체는 문제 상황을 자기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타자 탓으로 돌리기 일쑤입니다. 식민화된 의식은 무지·무책임·비접함·판단유예나 책임모면 하기로, 바쁘고 방황하는 영혼은 ‘정신승리법’이라는 술수로 자기합리화에 급급합니다. 그렇게 빚어진 인물형상 중에서도 아Q는 가장 괄목할만한 것입니다. 약 1세기 전에 그려진 인물이지만 현재에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위해 정형화의 부당성을 명시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함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루쉰은 제도로서의 식민주의보다는 중국인들의 사상의식 속에 뿌리 박힌 식민성을 어떻게 탈각시켜 주체적 민중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를 고뇌했던 것입니다. 루쉰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노정된 물리적 폭력에 대한 저항을 넘어 중국인의 영혼에 깃들어 있는 봉건성과 식민성을 깨치고 영혼의 식민성을 탈피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김용환 교수 “제가 읽은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나는 자경자멸의 일인자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는데 그게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 보느라 그 대목에서 오랫동안 멈춰있었습니다. 제가 1980년 5월 5.18운동이 일어날 때 대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건설 회사에 취직했었습니다. 매일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회사를 그냥 가자니 그렇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자니 그렇고 해서 말이에요. 저는 그때 회사를 사표도 안내고 그만두고 대학원이라는 제 3의 길을 택했는데 아Q정전을 읽으면서 그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이것은 스스로를 경멸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투사처럼 이 길이 옳다고 전력투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구박해서 결국 자기 마음까지 아프게 해서 사는 것은 결국 바람직하지 않고 결국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3지대에서 즉 사회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적 성취를 이루려한 것도 아닌 상황에 있었는데, 아Q 대목 대목을 읽으면서 생존전략 측면에서 정신승리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마음의 지평에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제가 꿈꾸는 방향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죠.”

▷이선옥 충북대 교수 “저는 아Q정전이 중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일상의 언어(=민중의 언어) 즉 백화로 쓰인 작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는 엘리트의 언어(=문장 언어)로 쓰인 문학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생활 감각이 희박했거든요. 저는 ‘아Q’적인 인간들 그리고 ‘아Q’적인 상황들을 생각해 봅니다.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영혼의 식민성’입니다. 자기 생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나 생각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지요. 아Q들이 만드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5.18에 관한 김용환 교수님의 언급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정체성이 확립될 때 세상이 정말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쉬운일이 아니잖아요. 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미완성이듯이 이러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아Q정전은 어느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상과 사회상의 한 전형을 그려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 자신의 개인적인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루쉰의 ‘아Q정전’은 1920년대의 중국사회를 처절한 비판적·반성에 근거해서 풍자적으로 그려놓은 중편소설이지만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한국인(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우선 자기 자신을 냉정하고 솔직하게 직시해 볼 때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자화상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저 자신이 지난 83년간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영락없는 아Q였구나라는 자의식을 통감하게 되고 그런 시대를 살아왔구나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시대가 아닌 시대에서 그런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장래세대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리 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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