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자금 모금·지원한 대구 ‘애국부인회’ 검거”

이충호 부이사장

●내용 간략 소개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통치에 있어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이에 대한 대책 강구에 나섰다. 당시 하라다케시 수상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부총독격인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을 조선에 부임시켰다. 그들이 중심이 된 일제는 3년간 조선에서 ‘성공적인’ 식민통치 체제를 정착시켰고 그 사례를 당시 담당 국장들의 좌담식으로 정리했다. 이때 좌담 내용은 조선총독부 편집국에서 15년이 지난 1937년에 ‘조선통치 비화’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이것은 당시 2차 조선통치기에 해당되는 이른바 ‘문화통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분야별로 소상히 정리해 둔 귀중한 자료이다.

이충호 일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은 1988년 도쿄 간다(神田)의 고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해 구입한 뒤 번역 및 편역한 내용을 동양일보 지면에 게재하고 있다.

● 애국부인회의 검거

▷아카이케 “경찰당국자는 본부와 각 도할 것 없이 필사적으로 그 직책 수행에 힘썼고 특히 민심의 추이와 경향 파악에 중점을 둔 결과 사업이 착착 그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실적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로 착수해 얻은 성과는 대구에서 애국부인회를 검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와 독립만세 소동과의 관계가 판명됐음은 물론 조선의 공기 및 민심의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이 향후 계획을 세우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는 제 3부장 신아츠 유지로(新壓佑次郞)씨의 공로로서 대서특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사건의 개요를 말씀드리면 기독교의 손을 빌려 황에스더(黃愛施德)와 김마리아 등이 모금을 한 후 상해에 독립운동 자금을 원조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자가 여러 명이 됐고 연락을 하는데 있어서는 ‘연통제(聯通制)’라는 조직을 이용, 교묘하게 암호와 은어를 써서 통신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상해의 임시정부를 해상회(海商會)라 칭하고 시가(市價)의 등락을 가지고 불온운동의 성쇠를 표현하는 식으로 통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조사결과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도 여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금까지 세브란스 병원은 다년간 배일사상의 소굴로 인정돼 왔고 그 병원장인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 박사는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2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보냈고 그 기간 동안 쌓인 경륜으로 특별히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또 그 병원의 선교사인 스코필드박사는 배일의 용장으로 알려져 세브란스 병원자체가 음모의 획책 근원지라는 평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헌병이 이곳을 임검한 바 있었지만 어떤 증거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래로 세브란스 병원은 더욱 더 불온한 자들이 마음 놓고 이용하는 장소라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애국부인회의 음모사건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들을 취조함으로써 그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어느 날 밤 에비슨 박사를 불러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았습니다. 에비슨 박사의 이야기는 ‘간호사나 신도들 그 외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충분히 주의할 것이고 관계자들에게도 훈계하여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굴 전면에 감개무량함을 감추지 않은 채 이어서 말하기를 ‘사실은 조선에 부임해 온지 20여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신도들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게 되었고 때문에 신도들이 호소·진정해 온 사실에 대해서는 항상 동정을 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충분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에비슨 박사의 충심을 헤아려 이 사건은 이미 검거한 간호사들에게만 그치고 그 이상은 수사하지 않도록 하고 그 일을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 후 동 병원에서는 법의 문책을 받을 만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이는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총독과 총감이 노력한 결과 중외의 기독교 측으로부터 공격은 점차 가라앉았고 미국의 국론도 많이 완화되었다는 점은 국가(일본)를 위해 참으로 경하해 마지않는 바였습니다. 특히 메서디스트(methodist·프로테스탄트의 최대 교파의 하나·감리교)파의 웰치 박사는 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꾸짖고 조선 내정에 대해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말라고 훈시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바뀌었습니다. 스미스씨 같은 분은 적극적으로 총독정치를 변호하고 나아가서는 미국인들에게 총독정치의 진상을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로교파는 좀처럼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특히 평양에 있는 장로교파는 상해와 조선과의 교통하도록 매개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구 애국부인회의 검거에 이어 불온한 조선인 특히 안동선 교통국에 근거해 활동하는 자를 검거하여 상해와 평양 기독교와의 관계가 점차 판명되어 오자 모펫트 선교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파 선교사에 대해 심심한 주의를 촉구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일본은 기독교에 대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고 미국에 대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이러한 총독부의 적극적인 태도는 일대 경이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선교사들에 대한 조선인의 관념은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이 일은 파도하나를 움직여 수많은 파급효과를 얻었던 것으로 기독교에 대한 민중 심리의 변화는 드디어 사회 각 방면에 대해서도 수많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애국부인회는….

애국부인회는 1919년 김마리아 등 여성지식인이 모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평양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부를 설립해 활동했다. 1920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조직의 활동들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면서 김마리아 등 간부 수십명이 체포되고 애국부인회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의 태도

▷마루야마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1889~1970)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지금 아카이케씨가 설명한 것처럼 스코필드는 열렬한 배일사상을 가진 자였고 그가 주장한 하나의 이슈는 공창(公娼) 폐지론이었습니다. 공창 폐지라는 것은 일본에서도 주창되고 있는 것으로 그가 조선에서 공창 폐지를 주장한 배경을 들어 보면 조선에는 일찍이 이와 같은 추업(醜業)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통치를 받고 나서부터 비로소 유곽(遊廓)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이는 일본의 악정의 산물이고 이로 인해 조선인은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반드시 이를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을 팸플릿에 찍어 곳곳에 돌아다니며 설파했고 젊은 부녀자들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여토록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청년회는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에도 일찍부터 이러한 매음(賣淫)은 있었고, 현재도 많이 있습니다. 공창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다소 연구한 바 있었기 때문에 스코필드박사에게 반론 연설을 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상 스코필드가 그 연설회를 그만 두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나와 스코필드 사이에 다소 연락이 오가곤 했습니다. 그 후 제가 외국 선교사들 사이에 신용을 얻게 된 한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내가 솔직한 생각을 가진 자라고 알려져 드디어 스코필드가 어느 날 제 근무처로 저를 찾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 때 스코필드가 무엇을 호소해 왔는가 하면 ‘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들을 유치시키는데 일본인 유치인과 조선인 유치인 사이에 대우가 매우 차이가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점심 식사부터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에게는 전혀 쌀이 들어 있지 않은 도시락을 먹이고 세수할 물조차 일체 주지 않는다, 유치장에서까지도 조선인을 학대하고 있다, 이는 너무나 불합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 이야기하면 곧 해결된다고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유치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지금 점심시간이고, 도시락을 줄 시간이니까 조선인을 많이 취급하고 있는 종로경찰서에 가 봅시다. 과연 그런 사실이 있다면, 즉시 개선 할 테니 함께 가 봅시다’하고 즉시 자동차를 불러 스코필드와 함께 종로경찰서로 갔습니다. 가면서 스코필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만 그런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그곳 서장에게 이러한 뜻을 말한 후, 유치장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유치장에서 도시락을 배부하는 것을 보고 조선인과 일본인 유치인에게 주는 음식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스코필드에게 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세수할 물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 이 유치장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조선인 하나를 불러 줄 테니 당신이 직접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한 후 3명 정도를 차례로 불렀습니다. 스코필드가 지명한 사람을 불러 그에게 직접 처우가 어떤가? 세숫물을 주는가 안주는가? 등을 묻자 조선인은 이를 모두 부정했고 세수할 물도 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코필드는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됐고 조선인은 참으로 거짓말을 잘 한다. 지금까지 조선인이 하는 말을 전부 믿었는데 조선인은 너무 거짓말을 잘 한다고 하며 일본인과 전혀 대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보고 감사해 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스코필드는 다소 나를 신용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또 한 번은 경찰에서 조선인을 취조할 때에 심한 고문을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호소하러 온 사람은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운 채로 손가락을 돌리는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이렇게 잔혹한 일을 빈번히 자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며 스코필드가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그 참 이상하군요. 당신이 그 손가락을 봤습니까?’하고 묻자 ‘아니 나는 보지 못했소.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이요’,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요. 실제로 손가락이 부러졌다면 그 부러진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 오시오. 그러면 내가 확인하겠소’라고 하자 ‘그렇게 합시다’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 호소해 온 사람을 불렀지만, 좀처럼 오지 않았고 ‘이는 조선인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일단락을 지었습니다마는 그 일은 그렇다 치고 지금 감옥 안에 있는 조선인이 부젓가락으로 엉덩이를 찔리는 고문을 받아 엉덩이에 화상을 입은 자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며 말을 꺼냈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감옥에 가 봅시다. 당신이 원하는 조선인을 불러 정말 화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봅시다’고 한 후 그가 지명하는 조선인을 불러 점검해 보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상처도 없었고, 또 본인에게 여러 사실을 물어 보았으나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형무소장 앞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일로 스코필드씨를 데리고 실제로 현장을 보인 이후로 지금까지 조선인이 호소해 온 말 가운데는 거짓말이 많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당신을 알게 되었다면 나 자신 또한 그렇게 맹렬하게 일본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조선인에게 우리들은 속았던 것 같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서로의 감정이 좋아질 무렵 미국에 남아 있던 그의 부인이 위독하다 하여 그는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잠시 경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씨는 이렇듯 재미있는 면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려 두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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