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문학박사·홍성·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 저자)

(이재준 문학박사·홍성·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 저자) 지난 4월 6일 ‘삼국시대 백강전투와 주류성, 21세기 부안의 문화비전 국제학술대회’가 부안군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일본, 중국교수 2명과 전북 일원의 7개 대학교수들이 참석하였다. 현재 전라일보에서는 기획&시리즈로 ‘다시보는 백제사’를 연재중이다.

주요내용은 백제 부흥운동 중심지로서 전북의 부안 우금산성이 확실시 되고 있으며, 부흥군이 천도했던 피성 김제는 백제부흥군의 수도였다는 주장들이다.

반면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된 충청권 일원의 최근 몇 년간 일간지에는 백제부흥군 위령제 기사 몇 줄뿐이었다.

언론매체를 비롯한 행정관서 및 연구자들의 미진한 활동으로 주류성의 위치가 전북 부안으로 고착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주장은 고산자 김정호가 밝힌 대동지지의 충남 홍성설이 최초로 추정된다.

이후 1913년 와세다 대학의 쓰다 소키치 교수는 백강은 금강, 주류성은 서천 건지산성이라고 하였다.

1923년에 조선 총독부의 오다 쇼고는 백강은 동진강, 주류성은 부안의 우금산성이라고 하였다. 이에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연기설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내학계는 아직도 일본의 쓰다설과 오다설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자들은 무덤 등에서 발굴된 유골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실증사학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는 과학적 검증 없이, 문헌기록을 무시하고 음운학적 지정학적 방법에 의한 주장뿐이었다. 1300년 전 왜의 접근성만을 고려한 식민사학의 일환이었다.

신·구당서의 내용을 보자.

663년 7월 경주를 출발한 문무왕과 김유신은 웅진도독부에서 당군과, 주류성 공격작전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 누군가가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가림성(성흥산성)을 먼저 치자고 하였다.

금강을 건너 주류성을 향한 공격로에 있는 가림성을 먼저 치자는 것이었다. 이는 주류성이 금강 이북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부안은 금강 이남으로 논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이때 유인궤는 병법에 피실격허(避實擊虛)라고 했으니, 방어력이 강한 가림성보다는 지세가 약한 주류성을 먼저 공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부안의 우금암성은 가림성보다 지세가 험하고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며, 금강 이남에 있어 문헌에 부합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을 보자.

8월 13일 청양 칠갑산의 두솔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킨 뒤에 임존성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다. 문헌에 여러 성이라고 되어있는 제성(諸城)은 주류성을 말한다.

그러한 성으로는 1~1.5km 내외로 떨어져있는 홍성의 학성, 소구니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 장곡산성(석성) 들이 있다. 반면 서천 건지산성이나 부안의 우금산성, 연기 운주산성 등은 주변에서 여러 성을 찾기 어렵다.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의 문헌기록은 무시하고, 일본서기에 지세가 방어에 유리하지만 농사에 부적합하다고 한 기록만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류성이라고 제기된 성들은 모두 위와 같은 지형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류성을 구하러 오는 왜의 수군이 주류성이 있는 변산반도를 돌아서 당군이 진을 치고 있는 동진강까지 갔다는 것도 군사학적으로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김제 피성으로 천도 토의에서 하루 밤 거리에 적이 있다고 한 일본서기의 기록도 무시하고 있다. 당시 김제 주변 하루 밤 거리에 나·당군이 주둔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부안 우금산성이 주류성으로 고착된다면 충청남도는 역사를 잃어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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