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더듬는 짜릿함에 빠져있는 동안 폰이 반짝거린다. 진땀 훔치고 주머닐 뒤져 그걸 꺼내본다. 커피에 삶 전체를 투사해서 시간 흐름조차 잊은 지인이 보낸 문자다. 답글 한 줄 보내기 바쁘게 단답형 문장이 날아든다. 대뜸 쿠바 유기농 커피를 사 달란 명령이다. 커피 홀러인 그도 쿠바 유혹에 서서히 빠져 드나 보다. 카페 있는 곳을 묻고 물어 다시 골목을 누빈다.
지름길은 문장 속 빛나는 은유처럼 감춰져 있다. 깊은 사유 끝에 찾아내는 게 묘미란 듯 아바나 골목 찾기란 방정식 푸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는 사이 따가운 햇살의 레드썬, 환청에 사로잡힌다. 곧바로 혼돈이 일어나고, 더듬이 잃은 듯 막 지나온 골목을 몇 바퀴 돈다. 땡볕 피하다 보면 방향이 어긋나고, 햇살 환한 골목엔 바람 지난 흔적조차 없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걷는 동안 쿠바노가 치노, 하폰 하며 시비를 건다.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린 나는 요 꼬레아! 라고 말한 뒤 씩 웃어 보인다. 악의 없는 말엔 건성으로 답 한 뒤 걸음 다잡는 게 현명하다. 재촉하는 사람 없지만 괜히 마음이 급하다. 목표가 세워지면 바삐 달려가곤 하던 그릇된 습관 때문이다. 잠시 깨달음 끝에 느적느적 걸어도 막 갈아입고 나온 옷이 묵직하다. 땀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그때서야 아바나 비에하 광장이 가슴을 펼친다.
오백 년 더께 씌워진 도시에선 시간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행자가 발 들인 한 두 시간은 찰나에 가깝다. 카페 엘 에스꼬레알을 뜯어보는 동안 푸릇한 일곱 아가씨가 등장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그들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검은 공 위에 엉덩이를 올리는 아가씨들, 규칙적으로 놔 둔 조형물 덕분에 간격은 자로 잰 듯 똑같다. 세일러복 차림으로 줄 지어 사진 찍던 70년대 학창시절을 보는 듯하다. 몇 컷 촬영 끝낸 그들이 또 다른 명소 찾아 떠난다. 그때서야 아가씨들 체온 남겨진 공을 자세히 살핀다.
다가가니 공 크기가 의외로 작다. 따끈따끈한 곳에 엉덩이 지졌으니 좌욕 제대로 했을 것 같다. 검은 색으로 양각된 뒷면 글씨를 읽어본다. 전부 읽긴 힘들지만 포탄이란 글씨가 망막에 예리한 파편을 꽂는다. 혁명에 세뇌된 그들 뇌리에 포탄쯤 별 것 아니겠지만, 섬뜩한 생각이 든 나만 겁에 질려 뒤로 주춤 물러선다.
포탄 이미지 지우려고 시선 둘 곳을 더듬는다. 마침 아이들 열 댓 명이 눈에 띈다. 그들 둘러서서 떠드는 걸 보며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인솔교사가 광장 바닥에 손가락으로 원을 크게 그린다. 애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선 위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곧이어 앉아 있던 애들 중 한 명이 인솔교사 수신호 따라 일어나서 시계 방향으로 달린다. 그 애가 누군가의 머리를 툭 치는 순간 술래가 바뀐다. 돌던 방향과 반대로 뛰던 술래가 또 다른 두 아이 머리를 툭툭 친다. 시계 방향으로 돌던 술래 둘이 제풀에 쓰러지고 놀이는 이어진다. 가만 보니 우리네 수건돌리기랑 꼭 같다. 별다른 장난감 없이도 애들은 흥겹기만 하다. 혼자 놀러 나온 아이는 수탉 동상에 둘러친 쇠사슬을 그네삼아 놀고, 또 다른 아이는 머리 위로 날린 야광 불꽃을 주우려고 이리저리 뛴다. 자전거 위에 앉은 아이에게선 유독 돈 냄새가 날 것 같다. 미국에 친척이 있거나 부모가 관광업에 몸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레스토랑 연기 터널 건너 카페 에스꼬레알이 빼어난 향기로 나를 당긴다. 키 높이만큼 쌓인 자루 앞 프런트 직원은 커피 파느라 정신없다. 줄지어 섰다 커피 사려면 어림잡아 한 시간은 시계 톱니바퀴를 돌려야 할 것 같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지레 포기하긴 억울해서 건너편 가게를 휘둘러본다. 열한 시 즈음의 하우스 맥주집은 앉을 자리가 없다. 술 없이 놀지 못하는 어른들이 자릴 빼곡하게 차지한 탓이다. 카리브해 휩쓸고 간 허리케인에 어릴 적 놀던 기억을 빼앗긴 건 아닐까. 그걸 놓칠 까닭 없는 장사꾼들이 추억을 되심어 주려고 수제맥주를 팔고 있나 보다. 숯불 로스터에 구워지는 닭 연기가 우리 치맥 흉내 내서 맥주잔에 덧씌워지고, 테이블 위 원통 유리그릇엔 황금색 술이 키 자랑을 한다.
안쪽보다 바깥에 놓인 테이블이 더 많은데 광장 아니었음 어찌 장사했을지 의아하다. 웃고 떠드는 소리 땜에 땡볕에 달궈진 광장은 용광로나 다름없다. 한 잔 마셔도 최면에 빠져들 것 같아 생각을 접는다. 더위 땜에 투덜거리다가 카페 에스꼬레알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커피를 주문한다. 여긴 별 말 없으면 분필 크기의 사탕수수 막대를 곁들인 에스프레소가 기본이다. 어른들 노는 걸 지켜보는 동안 알싸한 커피 아로마가 밍밍하게 힘을 잃는다.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백팩을 뒤진다.
홀로 노는 애들에게 준비해 온 풍선을 건네기로 맘먹는다. 달음박질로 스쳐 지나는 애들을 불러 세워 그걸 한 개씩 쥐어준다. 혼자서도 잘 놀던 아이들이지만 손가락 크기의 풍선에 환호한다. 사람 냄새가 돈 냄새를 쓸어내는 곳이니 값싼 풍선의 효용가치는 높다. 광장 여기저기서 커져가는 풍선, 그들 꿈도 모나지 않게 자라길 빌며 데미타세에 든 커피를 마저 들이켠다. 놓쳐버렸던 미각이 되살아나 혓바닥에 개미 수십 마리가 꼬물거리기 시작한다. <계속>
- 기자명 김득진 작가
- 입력 2017.09.21 18:57
- 수정 2018.01.1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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