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 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할머니는 귀찮을 때도 무릎으로 기어드는 우리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이야기를 펼치기도 하셨는지. 옷 사이로 손을 넣어 등을 긁어주거나 배를 문지르기도 토닥거리기도 하면서. 밖에는 찬 바람이라도 썰렁 불고 할머니 옛이야기를 들으며 잠으로 스르륵 빠져들면 세상은 얼마나 골방같이 아늑했던지. 눈이 안 좋아진 할머니가 반짓고리를 뒤적거리면 기다리고 있다가 자랑스럽게 바늘에 실을 꿰어 드리고는 실패에 감긴 실을 풀었다가 되감거나 골무를 손가락에 끼워보기도 하면서 구경과 참견을 하고, 그러다 심심해질 무렵 꾸벅, 졸고 있으면 바느질거리를 밀어두고 무릎을 내어주는 할머니 손을 느낄락 말락 잠으로 빠져든 그 달큰한 시간들은 내 몸 내 기억의 구석 어디를 잘 채우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한잠 잘 자고 나면 세상은 또 얼마나 개운하게 평화로웠는지. 아마도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야 이상하게도 우리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시간이 생겼는지 어쨌는지. 어쩌면 더는 어른들 무릎이 필요하지 않은 옛 이야기 재미없는 나이가 되었는지도.
 드라마가 그래서 또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무릎도 할머니도 아늑한 잠도 없으니 이 시대 할머니 역할 대행일 수 있겠다. 모닝 드라마는 방학 중에 보기 시작했는데 개강을 하고도 보게되는 날이 있다. 강의가 오후에 있는 날 식구들 물린 아침 식탁을 정리하고 선 채로 영양제를 한 알 먹으려거나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는 그 무렵쯤 뉴스 뒤에 흘러나오는 드라마는 무협지같은 활극이 전개된다. 명확하게 보이는 나쁘고 좋은 인물군의 극심한 대립은 어찌나 간명한지. 가해와 피해의 막강한 공격과 수비가 매회 일어나고, 기막힌 절단 테크닉으로 매회 끝은 결전의 순간에 멈춘다. 몇 회를 건너뛰고 보아도 알 수 있는 친절한 내용 되새김까지도.
 흥미롭게도 나쁜 사람은 참 나쁘게 절실하다.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선택만 한다. 그의 논리와 사고의 맥락은 ‘내가 그랬다고 해서’이다. 제 잘못은 ‘그렇다고 치고’ 자기 욕망 때문에 후안무치하니 반성이 있을 수 없는데, 남을 넘어뜨리고 이용하고 조작하고 누명을 씌운다. 때로 엄청난 허위를 동원해서 결국은 드러날 일을 저지른다. 그러니 그의 모든 애쓰고 힘쓴 것들이 허사가 된다. 그런 삶이 얼마나 안쓰럽게 바보같은지.
 착한 사람은 그냥 제 하는 일 하며 살다보면 여러 일들이 밝혀지고 해결되고 망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할머니 이야기처럼 권선징악의 안정적 구조이다. 젊은 때는 드라마를 보면서 전개 방향을 미리 알만하다는 익숙함에 멀미를 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어떻게 저렇게 잔혹하게 빠져나가고, 어쩌면 그렇게 당하는데도 꿋꿋이 일어서는지 아는 결말까지 당도하는 과정이 안전하므로 흥미롭다. 상상을 넘는 잔혹담이 넘치는 시대에 선한 것을 권하고 악한 것이 벌을 받는 이야기는 진리의 재확인에 가깝다. 그걸 아침 드라마는 실현하는 중이므로 나쁜 역할로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안쓰러움을 마음껏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순하게 살지 왜 그래, 왜 그랬어, 그 인물 그 처지 그 능력으로 고작 그깟 일에 못나게도 모든 걸 탕진하느냐고  등짝이라도 한 대 패주고 안쓰럽게 어리석어서 밥이라도 한 그릇 사먹이고 싶은 인물들은 때로 내 못난 어느 부분같기도 하다. 한 가지만 내려놓으면 될 것 같은데 집착하다가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삶이라니.
 푹신한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드라마나 영화같은 것을 보다가 스르륵 얕은 잠에 빠져들기도 하는 그런 평온한 일상, 썰렁한 바람부는 어느 날 밖에 나갈 근심없이 굴 속처럼 불도 없이 화면으로 흘러나올 얘기들을 비몽사몽 보다가 듣다가 조는 일은 휴식일 수도 놀이일 수도 향수일 수도 있을 터. 이야기 속 인물들이야 심각하거나 어쩌거나 유정하게도 무정하게도 그냥 저냥 보다보면 가을은 또 깊어져 갈 일이니, 슬픈, 그러나 아주 슬픈 영 이별 이야기는 말고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그런 가벼운 이야기를 보고 듣는 일을 생각한다. 그러자면 날이 더 추워도 좋으려나. 전쟁같은 끔찍한 위협 없는 깊은 가을 오면 화면 넓은 텔레비전을 하나 들여놓아야 하려나, 겨울방학에는 주방 그릇장에 매달린 작은 화면 말고 아침 드라마도 시원하게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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