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숙(공주시청 교육체육과)

최경숙 <공주시청 교육체육과>

타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많이들은 질문은 ‘고향이 어디십니까?’였다.

지금도 듣고 있는 질문이지만 답을 할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그 이유인즉슨, 고향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에 대해서 나 스스로의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자기 고향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도 있나’ 하는 핀잔을 줄지 모르나, 실제 포털사이트에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 질문이 꽤 많이 올라와 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학창시절은 강원도에서 보냈고, 대학부터 지금까지 전라도에서 살고 있어요. 그럼 제 고향은 어디인가요?’ 과연 이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 질문에 달린 답변은 각양각색이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다’, ‘가장 오래 산 곳이 고향이다’, ‘본적지가 고향이다’, ‘부모님이 계신 곳이 고향이다’ 등, 각자가 가진 고향에 대한 정의를 말한다.

흔히 고향이라고 하면 자신의 출생지 혹은 유년기를 보낸 곳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향(故鄕)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첫 번째의 뜻풀이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되어있다. 두 번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세 번째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네 번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으로 되어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위의 답변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여러 의미를 통한 개인적 판단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례를 들자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자신의 고향에 대해 물었는데, 아이는 고향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출생지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라고 말했더니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하더란다. 실제로 아이는 서울에서 산 게 고작 3개월이 전부이다. 그곳에서 낳았지만 백일쯤 됐을 때 공주시에 내려왔고 지금껏 살고 있다.

나는 아이에게 고향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덧붙여주었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럼, 고향이 바뀔 수도 있어?”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바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 내 스스로도 고향이라는 단어를 매우 보수적으로 인지해왔음을 알게 해준 질문이었다.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답을 내렸다. 고향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옛날에야 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대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가능했지만 오늘날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지역에서 태어났어도 학업의 이유로, 직장의 이유로, 결혼의 이유로, 인생 행보에 의하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게 된다. 친한 지인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학업을 마쳤으나 우연한 계기에 제주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고 제주도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자연스럽게 서울에 계신 부모님도 제주도로 이주를 하였고 제주도에서 평생을 살고 싶다고 했다.

이젠 제주도가 자신의 고향이라면서 말이다. 이 친구의 경우처럼 고향은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 든 정든 곳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출생지만을, 자신의 유년기를 보낸 곳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고향은 충분히 바뀔 수 있지 않은가.
고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단어이다. 상대방의 고향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방색(地方色) 혹은 지역주의라고 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언젠가부터 상대방의 고향 및 출신이 중요해졌고, 이는 그 사람의 성향을 판단하는 수단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고향을 악용하여 지역주의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또한 지역에 대해 선입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고향은 그저 나만의 고향으로 마음속에 간직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내 고향이 소중하듯 상대방의 고향이 소중함을 알고, 인생의 행보를 따라 고향은 바뀔 수 있으며, 혹은 한 곳 이상의 고향을 가져도 괜찮은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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