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영성을 영성해방으로 개신한 영성적 청주인

동양포럼은 ‘그리운 청주인’의 여섯 번째 순서로 청주 출신의 탁월한 사상가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정, 그의 삶과 뜻을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5월 22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토론자들. (왼쪽부터) 김용환 충북대 교수, 오문환 연세대 연구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휘 한울연대 공동대표, 나기정 전 청주시장,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용휘 천도교 한울연대 공동대표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위원장 유성종)는 그리운 청주인의 여섯 번째 순서로 청주 출신의 탁월한 사상가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정, 그의 삶과 뜻을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5월 22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이날 좌담회에는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나기정 전 청주시장, 김용휘 천도교 한울연대 공동대표 오문환 연세대 연구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가 함께했다. 좌담회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지금부터 25년 전쯤의 일로 기억합니다. 여러 인연으로 대만을 자주 방문했었습니다. 거기서 중앙연구원이나 국립대만대학에서 여러 중국인 철학자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자주 거론되었던 인물 중 하나가 모종삼(牟宗三)이었고 특히 그가 중국 철학의 정통성을 공자·맹자·육상산·왕양명을 잇는 ‘심학(心學)’에서 찾고 있다는 심학적 유학관에 대한 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의제기 때문에 생겼던 격렬한 논쟁이 생각납니다. 저의 개인적인 문제 관심은 중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나기정 전 청주시장

국철학이 심학적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그것과의 대비하는 측면에서 한국인의 철학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구태여 그렇게 대비적으로 말해보라고 요구한다면, 영성학(靈性學)적임을 새밝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영성은 근원적 생명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명학(生命學)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선 가설적인 명제를 제시한다면 심학은 생명을 마음의 문제로 다루는 데 비해서 영성학은 마음을 영성(=생명력의 한 기능)으로 새밝힘 합니다. 그리고 혼(魂=넋)이 개체생명의 근원적인 생명력인데 비해서 영성은 개체생명과 개체생명 사이에서 함께·더불어·서로 잇고, 맺고, 살리는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얼)과 혼(넋)은 다른 것임을 감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저의 견해는 대만인 철학 교수들에게 이해되지 않았고 격렬한 반론만 일으켰습니다. 그 후에 일본인 철학 교수들이나 한국인 철학 교수들에게서도 관심조차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의 개인적인 입장은 한국인의 사상·철학·문화의 독자성과

오문환 연세대 연구교수

자립성을 제대로 세우고 그것을 우선 동아시아적 현실 포월적 생성력을 지닌 것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소위 ‘심학’ 패러다임을 안고 넘어서야 한다는 데 초점화 돼 있습니다. 그 작업을 서울이 아닌 청주에서 지방간·세대간·남녀간 상생의 인문학을 창발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의암 손병희의 사상·철학·문화 개신의 의지에 공감을 느꼈고 그것을 저 자신의 개인적인 뜻을 담아 영성해방을 주축으로 해서 한국인의 영성을 새밝힘 한 선배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청주를 물질로 선양하려는 것과는 달리, 청주-충북-한국 동아시아를 함께·더불어·서로 살리고 사는 원동력으로서의 영성(의힘)을 일체의 물질적·정신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했던 영성적 청주인으로 뜻매김하려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용휘 한울연대 공동대표 “제가 2년 전 청주시 북이면에 있는 의암 유허지를 찾아갔을 때 너무나 쓸쓸한 모습에 한없는 적막감을 느꼈습니다. 그가 태어난 청주에서도 완전히 망각된 존재인데 김 주간이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려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오문환 박사 “방금 김용휘 교수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청원군 북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 동학에 입문해 익산에 있는 사자암에서 동학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13년 정도가 지난 후 1897년도에 해월 신사(최시형)이 교수형 당하기 한해 전 도통을 전수받아 3세 교주가 됩니다. 해월 신사가 1898년 교수형 당하고 주로 북쪽 지방을 전전하며 도를 전하다가 1901년 일본, 상해로 갔다가 1905년에 일본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하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1909년 통도사 내원암에서 기도를 하면서 시를 하나 받습니다. “옛적에 이곳을 보았는데 오늘 또 이곳을 보는구나”라는 시입니다. 이때 수운 선생(최제우)과 자신이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중요한 경전들이 출판됩니다. 계속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가 1914년에 공동전수 신법이라는 것을 통해 스승이 제자에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한 번에 도를 전수했습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가 1920년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2년 돌아가십니다. 해월 선생의 가장 큰 특징이 한편으로는 수도로 영성을 개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사회와 고립된 것이 아닌 사회운동과 함께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최시형은 동학운동을 함께 했지만 의암 선생은 수행을 통해 개인적인 영성도 깨닫지만 정치운동, 사회운동으로 이어나간 것이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의암의 정치사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와 의암 손병희의 국가건설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애국계몽, 민애운동, 민족독립운동 등을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1909년도를 기점으로 상당히 중요한 영적, 철학적, 정신 사상적 전환점이 옵니다. 의암 선생은 ‘성령출제설’이라는 글을 통해 독자적인 생사관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완전히 철학화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정치철학을 전공한 저는 민주주의, 공화주의는 동학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정이나 공화정이 이승만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정립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3.1운동이 왕정에서 공화정, 민주정으로 이양되는 결정적 계기라고 보고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철학적 국부로 의암 선생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 공화정 운동의 출발점은 동학과, 동학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민주주의 운동의 토대는 동학사상에서 시작해서 동학농민운동으로 표출됐다가, 의암 선생의 3.1운동을 통해 정착됐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유럽의 정치체제를 수용한 것이죠. 다음은 의암의 생사관과 성심론입니다. 의암은 유교와 불교에서 공용되는 성심을 활용해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시천주’ 개념은 수운 선생이 확립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만든 것은 의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출제설은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추고 있고, 철학적으로는 성심문제를 다루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3.1운동을 겪었으니 이를 토대로 대한민국이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나 종교 같은 밑바탕 없이, 문명적 운영의 독자성 없이 받아들인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토대에서 비로소 세계를 끌어나갈 수 있는 이념이나 비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의암의 정치사상입니다. 민주공화정을 의암이 어떻게 수립하려고 했느냐. 첫 번째는 계몽운동입니다. 서양의 계몽주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바탕이 있는데 바로 도덕문명입니다. 사실 동양문명의 시작은 도덕입니다. 도와 덕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서부터 문명이 시작됐습니다. 새로운 시민, 인민이 탄생해야 한다는 것은 문명계몽에서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만세보에 ‘준비시대’라고 해서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민회, 국회 등을 이야기 하는데 민(民)이 깨어나야 국가가 산다는 것입니다. 이후 진보회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일제가 철도를 놓을 때 동원됐던 사람들이 진보회입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친일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습니다. 진보회가 이후 일진회로 변합니다. 손병희 선생은 이영두와 달리 조선에 돌아와서 본인이 생각하는 민회는 일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동학에 뿌리를 두고, 동학의 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의암이 서구 유럽의 근대성이나 일본의 근대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예운동을 통해서 기초를 마련했고, 천도교 대헌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천도교 대헌은 근대의 삼권분립과 비슷한 구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 헌법에 가장 모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로 갈 때 천도교 사람들이 많이 지원을 했고, 단군교도 지원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이념적 기초도 천도교에서 연원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1905년에 돌아오자마자 손병희 선생은 5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의동 봉황각 대지를 사서 거처를 그쪽으로 옮겨 49일, 105일 기도를 수련시킵니다. 천도교의 핵심은 모든 존재가 천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종교에서 갈구하는 존재가 되면 내 안에 있는 진짜 성령, 천주는 영원히 산다는 이야기를 성령출제설에서 강조했습니다. 그 성령이 우주의 물질, 식물, 동물로 다 들어나 모든 존재들은 그 실체, 근본을 알면 모양, 이름은 다르지만 다 성령이고 다 한울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의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성령출제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나’라는 것이죠. 3.1운동 이후에 독립운동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그중 3개 단체에서 손병희 선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사료를 봤습니다. 천도교 원로들이 하는 말씀이 임시정부를 서포트하는 것은 국내에 있던 천도교 조직들이 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후반기에 가게 되면 대종교에서도 임시정부를 많이 서포트 했다고 합니다. 1919년에는 이미 군권도 다 빼앗긴 시대였기 때문에 도덕을 계몽시키고 민의 역량을 결집시켜 독립운동을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내천’ 문제는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사실 혜월 신사의 말 중에는 ‘인내천’의 본의를 말씀하시되 ‘사인여천’하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인내천은 의암 손병의 선생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최제우가 이미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죠. 하늘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주를 모시라고 하니까 ‘모신다’는 의미를 많이 궁금해 했습니다. 최시형 선생은 자기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자기 안에 신령이 있는지 명확해야 천주를 모셨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서양 사람들이 제기하는 신과 인간의 문제는 동양의 인문학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 주간 “‘인내천’은 의암 손병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운 최제우가 이미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김용휘 박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대표 “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우선 의암 손병희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내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학이라고 하면 보통 ‘인내천’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사상의 핵심은 ‘시천주’입니다. 그렇다면 ‘시천주’의 ‘하늘을 내 안에 모신 인간’과 ‘인내천’의 ‘사람이 하늘이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역사적-동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보면 ‘인내천’은 동학의 3내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대표적인 종지로 내세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인내천’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비슷한 표현은 해월 최시형 때부터 ‘심즉천(心卽天)’이나 ‘인시천(人是天)’ 등으로 나옵니다. 해월 최시형이 ‘인시천’을 얘기하는 맥락은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事人如天)’에 있습니다.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의 자각이요, 거기에 바탕을 둔 ‘섬김’이라는 실천적인 관련성이 강조된 것이지요. 그러던 것이 의암 손병희에 와서 동학이나 천도교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왕에 말을 하게 되었으니까 저의 의암 이해에 관해서 몇 가지 지적해 두겠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변천기에는 늘 그 현장에 의암 손병희가 있었습니다. 동학운동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개화운동이나 민족 독립운동 등 언제나 의암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에서나 한국에서 그의 존재와 행적은 망각되고 매몰됐습니다. 3.1운동 하면 유관순의 그늘에 물러서게 되었고, 민족독립운동이나 민중계몽운동 하면 반대파의 친일 논란으로 폄하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악의적인 중상모략에 연유된 측면도 있고 학술연구의 편향과 교육과정의 왜곡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고려대의 최동휘 교수나 조지훈 시인 등이 한국 사상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박종헌 교수의 한국철학사를 연재도 하고 대부분의 지면을 동학의 참모습을 보여주는데 힘을 기울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악화된 실정입니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의암이 없었으면 지금의 독립도 없었다고까지 말했다는데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이 당시 천도교가 만주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에 상당한 활동자금 지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런 모습은 평전을 통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세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이 ‘삼전론’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사상가로서의 손병희, 영적 지도자로서의 손병희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항상 이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의암은 훌륭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남긴 시를 읽어보면 깨닫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시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평소 의암이 강조한 것은 ‘이신환성(以身換性)’입니다. 마음을 육신에 두지 말고 성품이 주체가 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인내천의 실천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성령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이며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도교의 사후관은 정신이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세대의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한사람의 정신 안에 전 우주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암의 삶은 천도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의 실천적 활동가로 겨레를 위해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회는 이러한 모습을 조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사상계가 나태한 탓이며 구조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 몇 년 남지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그 분의 삶을 제대로 기리는 일을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청주에서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김 주간 “김용환 교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용환 충북대 교수 “손병희(1861~1922년)의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이며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입니다. 동학교도들은 천도교 제 3세 교주로서 의암성사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청주로 편입된 청원 출신으로 방정환(方定煥)이 사위입니다. 22세 때인 1882년 큰조카 천민(天民)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습니다. 1892년에는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고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보은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최시형의 참모로서 활약하였습니다.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으며 1897년 12월 24일 3대 교주로서의 실질적인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해 유학생이 상당히 배출되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도교양을 위해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동학의 정신을 되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세상 혼란은 마음 혼란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천도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이며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천도(天道)를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용구를 필두로 친일 배교분자(背敎分子)들의 매국행위를 보고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 다동(茶洞)에 설치하였습니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자인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불리함을 깨닫고 1906년 9월 17일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黜敎處分)을 내렸습니다. 천도교에서 쫓겨난 이용구·송병준 등 친일파는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폈습니다. 손병희는 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와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에 관계하고 보성학원을 인수·경영하였습니다. 의암은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고 일원화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습니다.”

▷김 주간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의암이 어떤 인간이여 어떤 일을 했는가와 함께 어떤 사상·철학을 펼쳤는가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무체법경(無體法經)’에 주목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김 교수 “동감입니다. 저도 ‘무체법경’을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무체법경’은 1910년 2월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동안의 수련을 마치고 발표한 책입니다. 사회운동만으로 교단을 이끌어가기가 어렵게 되자 종교적 수행에 치중하는 방침을 세우고자 집필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성심변’에서는 성과 심은 근본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므로 성심쌍수(性心雙修)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에서는 성(性)·심(心)·신(身)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성신양방(性身兩方)의 수련을 해야 하며 ‘신통고’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견성각심(見性覺心)의 경지에 이르러야 되며 자심자성(自心自誠)·자심자경(自心自敬)·자심자신(自心自信)·자심자법(自心自法)의 주체적 수행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견성해’에서는 마음 밖에 천과 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구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삼성과’에서 원각·비각·혈각의 단계를 거쳐 가면 견성각심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고 ‘삼심관’에서는 허광심·여여심·자유심에 이르게 되는 것에 관해 ‘극락설’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잡힘을 말했고 ‘성범설’에서는 성이 근원이 하나이므로 수행을 통하여 자리심→이타심→공화심→자유심→극락심에 이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진심불염’에서는 자천자각(自天自覺)의 경지에 이르면 나와 하늘, 성과 범, 개인과 세상, 죽음과 탄생이 둘이 아닌 해탈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김 주간 “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관심은 최근에 와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에 초첨화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정신적 속박·종속·예속상태에서 몸과 맘과 넋이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함양에 주력해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선인들이 남겨준 문헌자료를 살펴봤는데 의암 손병희의 행적도 그렇지만 특히 ‘무체법경’에 주목해왔습니다. 저의 짐작입니다만 오문환 교수도 ‘무체법경’을 중시하는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오 교수 “예 저도 ‘무체법경’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김 주간이 말씀하시는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은 의암이 ‘무체법경’에서 강조했던 ‘자유심(自由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의암에 의하면 ‘자유심’이란 ‘위하고 위하는 마음(爲爲心)’인데 모든 활동의 시작이며 모든 마음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하고 위하는 마음’=자유심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는 사사로운 마음·물질적 대상이나 자아가 만들어낸 추상적 세계에 빼앗긴 가짜 마음인 ‘물정심(物情心)’을 포함하는 ‘마탈심’이 자유심의 자유를 박탈하고 물질적 정신적 예속상태에 묶여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심이란 일체의 인위성을 떠나서 오직 스스로 그러한 경지를 말합니다. 하늘을 흐르는 구름처럼,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흐를 뿐입니다. 자유는 자연과 함께 무위이화(無爲而化) 합니다. 일체의 거짓을 떠나 자연처럼 진실합니다. 자유는 나도 떠나고, 너도 떠나고, 하늘도 떠나고, 땅도 떠나고, 신도 떠나고, 티끌도 떠나고, 오로지 진리 본연의 길을 걸으며 진리 본연을 행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참 존재의 모습입니다. 이 경지에서는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고, 무엇을 알려고 하지 않지만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김 주간 “제가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다니면서 공공하는 철학 대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특히 그 초기에 부딪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주로 서양?특히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연구·교수하고 돌아온 일본인 전문가들이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비해서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공공하는 마음’을 어떻게 자각하고 체인해서 일상적인 생활현실에서 실천하느냐에 중점을 두는 입장 차이 때문에 생긴 격심한 갈등·대립·논쟁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공공하는 철학적 상상력을 부추겨 준 것은 의암 손병희의 ‘공화심(共和心)’이요 자유심이라는 키워드였지만 그것에 대한 소상한 내력이나 그 말이 쓰인 맥락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말들이 의암의 ‘무체법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무체법경’을 제대로 읽어보려는 뜻은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일들에 쫓겨서 적당한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 교수 “의암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모두 하나 되게 하는 마음을 ‘원원충충(元元充充)’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든 것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의암은 이런 마음을 ‘위하고 위하는 마음(爲爲心)’이라 하고, 남을 위하고 위하는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며, 이것이 본래의 ‘나’의 마음이며 ‘그’의 마음이기도 하니 ‘공화심’이며,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들 사이에 일체 차이가 없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자유심’이라는 것이 ‘무체법경’에 설파되어 있습니다.”
▷나기정 전 시장 “천도교가 사상이나 철학을 넘어서 종교까지 갔다고 하는데 저는 종교라고 하면 내세론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세관이 없다면 종교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철학과 사상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로서의 입장인지 궁금합니다.”

▷오 교수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은 시간의 범주 밖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신 안에 존재합니다. 신으로부터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들의 의식은 시간 안에 존재하고 있어요. 천, 신, 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마음 안에 있어서 미래, 현재, 과거도 다 마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세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자기 마음 안에 갖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전 시장 “시간을 초월해서 인내천이라는 것이 내 마음에 신이 있다는 것인데 육신은 죽어 개개인이 영으로 남는 다는 것인지 하늘에 귀속되고 마는 것인지, 개체가 없어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 박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체가 있지 않습니까. 개체의 실체는 실상은 없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개체 존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옛날부터 지공무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동양적인 마인드를 설명할 때 빌-허, 없을-무, 빌-공자를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체가 무엇이냐 설명하는 일 자체가 어렵습니다. 천도교에서 제일 강조하는 게 한순간이라도 하늘의 기운을, 하늘의 마음을 접해봐야지 강령이 되어야 비로소 입문을 했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문자로 아무리 설명해도 아직 신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강령이 되지 않으면 아직 신을 접하지 않은 것이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 개인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나 전 시장 “저는 오늘 의암 손병희 선생에 대해 정말 심오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내천 사상은 개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깊은 철학과 사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몰랐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 터도 관리가 전혀 안 돼 있습니다. 어떤 젊은 친구가 관리를 한답시고 하는데 돈을 요구하더군요. 지금까지 관리한 수고비를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의암 비석을 세운다며 개막식을 한다고 해서 쫓아가보니까 천도교 교령 중심이었고 민족대표 이야기는 조금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청주가 자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행정을 하면서 늘 느꼈던 사항들입니다. 청주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청주인들의 긍지를 높여주고 한국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동양철학이 얼마나 깊은 사상이고, 의암이 얼마나 훌륭한 사상을 가졌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의암 손병희를 고장에서 선양하는 운동을 펼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 교수 “언젠가 한번 의암 선생을 주제로 좌담회를 해서 깊은 뜻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유적지를 함께 복원하고 더 기려서 그야말로 의암을 청주의 정신으로 되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김 대표 “최시형이 오랫동안 수도했던 곳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청주에서는 아름답게 보존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100주기가 4~5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준비를 청주가 앞장서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손병희기념사업회가 있어서 평전도 처음에 나오고 했는데 그 이후 활동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청주가 그러한 기념사업의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오 교수 “의암 손병희가 생각하고 구성한 것이 진짜 어마어마합니다. 아직까지 그 가치를 몰라서 그렇지, 천도교 안에는 실제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손병희의 꿈을 책으로 담아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김 주간 “오늘의 대화는 역시 심학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영성학=생명학=생학은 심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심학의 차원에서 의암을 생각해보는 단계도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공화심’이나 ‘자유심’은 이미 마음의 차원을 안고 넘어서는 영성의 차원에서 새밝힘할 필요가 있고 그 말들로 나타내려 했던 의암의 깊은 속뜻은 영성해방을 통해서 마침내 이르게 되는 공공하는 영성을 새밝힘함으로써 한철학적 영성론의 새차원·새지평·새세계를 엶-개신-으로써 동학개신을 겨냥하고 새로운 한국인의 사상·철학·물화를 일으켜 세우려 했던 것이 아닌가 저 나름대로 그리고 기리고 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