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원(논설위원 / 신성대 교수)

(신기원 논설위원 / 신성대 교수) 생애 처음으로 맞이한 가을방학 같은 추석연휴가 어느새 지나갔다. 연휴를 앞두고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하고 기대에 차있었지만 막바지에 접어들어서는 아쉬움만 남았다. 오히려 하루만 더 쉴 수 없나 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와야 오늘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10일간의 추석연휴 중에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과 동창들을 만나서 이야기꽃도 피우고 추억을 쌓았다. 고달프고 답답했던 하루하루를 위로받고 용기도 얻는 힐링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고향이란 이런 점에서 가슴 벅차고 뿌듯해지는 단어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존재의의를 느끼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해주는 단어 그것이 바로 ‘고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전에는 고향을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이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또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정의하여 고향이 장소적 개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필자 역시 어릴 적 즐겨 불렀고 요즘도 가끔씩 흥얼거리는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의 가사처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고 그곳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울긋불긋 꽃 대궐을 차린 동네라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다는 상념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의 깊은 영향 때문이다.

이런 연유에서 필자는 언젠가 노인복지관에서 특강을 할 때 어르신들에게 ‘저는 고향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고향에서 자라서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필자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곳에서 사시다 수년전 이사를 하셔서 현재는 다른 동네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명절 때나 집안 행사 때 부모님을 방문하다보면 정겨운 마음이 아니라 낯선 곳에 왔구나 라는 기분이 든 적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향하면 멀리서 입구가 보일 때부터 가슴 벅차고 설레는 곳 아닌가. 예전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방학이 되면 놀러갔는데 그때는 정말 그랬었다. 할머니 댁을 언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곳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도시계획으로 안마당이 도로로 편입되어서 작은 아버지께서 보상을 받고 이사를 하셨다. 그 뒤 작은 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봤지만 예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게 변하여 마음만 심란하였다. 필자 또한 대전에서 사십년 가까이 살다가 서산으로 이사와 그 절반 가까이 살고 있다 보니 고향이 어딘가 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얼마 전 여동생이 미국에서 와서 이번 추석연휴에 부모님을 모시고 육남매가 설악산에 갔었다. 삼십년 가까이 한집에서 컸다가 이제 그만큼의 세월을 각자 산후 다시 모여서 새벽같이 일어나 함께 일출을 보러가노라니 옛 정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육남매가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까지 오르다보니 다리는 천근같고 땀은 비 오듯 하였지만 마음은 포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또한 헤어지려니 아쉬움이 컸다.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누구의 말마따나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고,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각자에게 고향은 공간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하며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족을 통해 고향내음을 맡을 수 있고 고향을 찾아갈 수 있다. 또 일가친척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서 고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고향이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지 라는 노랫말은 이래서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새롭게 고향을 발견한 것은 이번 추석연휴의 큰 수확이다. 이제 고향에서 받은 격려를 밑천삼아 희망을 품고 살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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