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옥천문화원장>

가슴 조일 때가 있다. 간절히 원하는 일이고 보면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014년 12월 13일 오후 2~6시 일본 동지사(同志社)대학 신학관에서 4회 일본정지용문학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은 옥천군·옥천문화원·코리아연구센터가 공동 주최·주관했다.

이때 동지사대학 야마다시로 부총장은 개회사에서 “정지용의 문학포럼을 열게 돼 기쁘다며 아침에 출근할 때 정지용과 윤동주 시비에 헌화하고 기도하는 한국유학생들을 보며 그들에게 두 분의 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았다. 어려운 한일관계 속에서 정지용의 동지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포럼을 통해 학술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옥천문화원장이라는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보니,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열리던 정지용문학포럼이 중단되어 있었다. 정지용의 고향 옥천이라는 특수성과 한국문학의 발전 그리고 정지용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2005년 동지사대학 교정에 정지용 시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8년 1회 일본정지용문학포럼을 열었다. 그런데 우여곡절로 인해 포럼이 3회에 중단됐었다. 이 문학포럼의 재개는 2013년 12월 당시 옥천군 김성종·박정옥 팀장과 옥천문화원 유정현 부원장, 고운기·박세용 교수, 김묘순 문인협회장이 동지사대학 국제교류센터와 사전 협의를 하러가며 시작되었다. 이 협의는 다행히 긍정적이었다.

동지사대학 국제교류 센터장은 이 자리에서 적극적인 검토를 약속했다. 옥천군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표명하고, 나는 2014년 문학 포럼을 위해 모든 공을 들였다. 옥천군의 의지가 굳건했고, 일본정지용문학포럼에 대한 열망이 컸기에 옥천군민 모두 이 포럼 추진에 힘을 보태줬다. 참 고맙다. 두고두고 고마운 마음이다.

정지용은 일본인이 무서워서 산이나 바다로 도피하여 시를 썼다. 친일도 배일도 할 수 없어 산속에 숨지도 논에서 삽을 쥐지도 못 했다고 일제강점기 그의 심정을 토로했다. 즉 정지용의 산수시가 일본으로부터 도피로 인해 태어난 시지만 그 속에는 도피도 친일도 할 수 없는 갈등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참 슬프고 애달픈 일이다.

한국에서 정지용을 연구했던 천리대학의 오까야마 교수와 교토의 거리를 걸었다. 정지용이 유학시절 여학생과 걸었다던 압천과 식민지 청년의 고뇌를 안고 들렀던 카페프란스 그리고 유곽의 거리를 지나며 그를 생각한다. 정지용의 문학은 한국문학의 주춧돌이라는 생각이 내 어깨를 무겁게 누른다. 그 무게가 무거울수록 희망이 커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정지용이라는 매개체로 한국과 일본의 문학과 문화외교를 성공시켰다는 뿌듯함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정지용과 옥천 그리고 그가 떠나며 혹은 다시 돌아오며 겪었던 고향 옥천과 타향을 그의 이름으로 하늘에 매달아본다. 속으로 타는 울음으로 다시 열고 진행했던 일본정지용문학포럼. 이제 그 노래를 불러본다.

정지용이 지났던 교토의 거리와 압천상류 그리고 카페프란스와 유곽을 그려본다. 당시 힘을 모아줬던 일행들과 함께 애타게 갈망했던 정지용문학포럼을 생각한다. 그때가 자꾸만 그리워진다. 정지용을 향한 애처롭고 쓸쓸한 마음을 그의 이름으로 다시 기억해낸다. 이 가을, 어디선가 낙엽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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