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16일 사실상 ‘재판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러한 ‘역공’의 발화점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사법부가 발부한 구속기한 연장이 있다. 내심 불구속 상태에서의 재판을 기대했던 박측은 상실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재판을 보이콧 하고 이에 부응해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한 것은 국정농단 사태를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가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이에따라 박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촛불집회와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검찰 수사, 재판부 모두를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그가 재판에서 한 말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구속기한 연장을 당하면서 더는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요, 이참에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속뜻이 읽히는 대목이다. 일종의 정치적 승부수인 셈이다.

그가 지금까지 벌인 정치적 승부수는 대체로 성공을 거뒀었다. ‘차떼기’로 한나라당이 풍비박산 직전까지 갔을 때 그는 과감하게 천막당사를 실행했다. 2006년 지방선거 때도 그랬다. ‘커터칼 테러’를 당하고서도 “대전은요?”라는 워딩을 통해 참패가 예상됐던 선거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으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고비 때마다 판세를 일거에 바꾸었던 그의 절묘한 행보가 이번 만은 먹히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마음을 돌리기엔 박 전 대통령이 벌여놓은 국정농단의 책임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스스로 억울하다는 자기최면에 빠졌다거나, 혹은 실제로 억울한 측면이 있을 수도 있다. “저는 롯데·SK 뿐만아니라 재임 기간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사실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라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그 법과 원칙을 위반하는 일을 무엇보다 경계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공소 사실들은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린다. ‘최순실의 농단이었을 뿐’이라는 책임 떠넘기기도 통하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가지고 있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고, 이에 대한 사실을 조작했으며,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좌우 이념 프레임을 덧씌워 문화 예술인들을 탄압했고, 경제 수석을 내세워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들은 “내가 직접 나서서 하지는 않았다”는 변명으로 덮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부에 대한 불신을 내세우며 변호인으로부터 자기 방어권까지 포기하면서 재판 보이콧을 선언하고 ‘판 흔들기’에 나선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가장 강조하고 즐겨 이야기했던 ‘법과 원칙’을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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