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희 <충북도의원>

길에 나서면 나는 완전 자유롭다. 불어오는 바람, 청량한 공기, 따뜻한 햇살, 이 모든 게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 오는 대로, 날이 춥거나 더워도 그래서 좋다. 길을 나서면 세상 모든 것과 동화되어 일체화 되는 그 느낌을 사랑한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몸이 좋지 않던 날 걷기운동을 제안 받았다. 그리고는 매일 한 시간 이상씩 걷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달라졌다. 기왕에 걷는 일이라면 똑바로 걸어보자고 했더니 4~5년 만에 몸이 곧아졌다. 팔자걸음이 고쳐진 것이다. 술 먹고 난 다음에는 무조건 한 시간을 걸어 알콜 끼를 뺀 다음 잠에 들었다. 다음날이 가뿐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걷기시작하면서 머릿속이 자연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전 걷는 동안 먼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하루 동안의 일정도 아침 걷는 동안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준비할 수 있다.

걸어서 한 시간씩 출퇴근을 하는 동안 계절의 변화에 따라 풀꽃들의 우점종이 바뀌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지지난주에는 코스모스가, 지난주에는 왕고들빼기가 꽃을 피워 대세가 되더니 이번 주에는 산국의 향기가 우리 뒷산을 노랗게 물들였다. 매일 그 날 그 날 보이는 풀꽃들을 사진 찍으며 SNS에 느낌과 함께 올렸는데 한 2년쯤 된 날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내 ‘우리 동네 풀꽃이야기’라는 풀꽃에세이 책을 내게 됐다. 그리고는 올해 개정증보판 까지 출판하게 된 것도 모두 걷는 동안 생긴 일이다.

몇 년 전에는 제주도 올레길 21코스를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일단은 열흘, 그 다음해는 일주일 정도를 투자 했다. 제주도 비행기 표를 끊어놓고 일정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는 훌훌 떠났다. 속옷 두 벌과 양말 두 켤레, 상비약, 물통이 전부였다. 잠은 게스트하우스나 민박에서 자고 식당을 만나면 식사를 해결했다. 처음으로 떠나는 설렘보다 걱정이 더 많아서 제주 올레길 관련 서적과 걷기 서적 수 십 권을 사전에 보고 떠났다. 나중에 그 책들 대부분이 기억도 안 났고 도움도 안 된 느낌이었다. 그냥 길 걷다보면 다 해결 되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 혼자 걷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묵언수행을 하게 된다. 주변이 고요해 지면 걷는 동안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 보기도 하고 다른 상상으로 옮기기도 한다. 혼자 걷는 동안은 스스로에 대해 겸손해진다.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물집 잡힌 발의 통증이나 흐르는 땀방울의 느낌까지, 사회적 권위와 편견 등을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허명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성찰까지 가능하다. 그래서 걷는 동안 자유로워진다.

오랜 시간 걷게 될 경우 국토대장정 같이 걷는 것은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보여주기 위해 찻길, 그것도 아스팔트만 걸을 경우 무릎에 부담을 주게 되고 매연에 노출될뿐더러 걷는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착지가 목표가 되면서 마치 군사작전 하듯 단체행동을 요구받게 되기 때문이다. 걷는 것이 고행이 되거나 힘든 훈련의 과정이 된다면 내가 예찬하는 걷는 행복 따위는 이룰 수 없다.

걷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성장과 휴식을 위해 선택해야한다. 걸으면서 사색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해파랑 길에서 돌아오자마자 해파랑 길의 이후 코스가 다시 나를 부른다. 처음에 길은 떠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길은 돌아오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길 위에서 참된 자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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