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일제에 맞서 ‘점포 폐점’… 일 경찰 ‘강경 대응’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운영한 점포의 모습. 당시 상인들은 폐점·철시로 일제와 맞섰다. 이들의 폐점·철시는 식민지 경제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일제는 폐점·철시를 막기 위해 중요 상인들에게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충호일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

 ● 최초로 경무 당국의 솜씨 발휘

▷마루야마 “드디어 10월 1일에 폐점을 실행한다는 사실이 명료해졌습니다. 저는 이를 총독부에 새 간부가 결성된 이후 첫 번째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폐점사건이 잘 처리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갱생을 위한 경찰의 위신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국장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젊은 사무관들을 때 마침, 내 생일이었던 9월 27일에 모두를 관사에 불러 모아 충분한 토의를 했습니다. 젊은 사무관들 중에는 폐점한다는 사실은 단지 소극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들을 처벌해야할 아무런 규정도 없고 어떤 명분으로 이를 간섭해야할지 모를 뿐 아니라 규제할 명분이 없다며 다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경찰의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때이고 설령 폐점을 한다고 할지라도 언제까지 그 폐점이 지속될 리가 없을 것이니까 오히려 방임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것이 하나의 획기적인 사실이 될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적극적으로 가게를 열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토론으로 거의 밤을 지새웠고, 결국 폐점금지령이라는 새로운 경찰 명령을 발포하여 그 명령에 의해 이를 취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안에 폐점금지령이라는 초안까지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이와 같이 젊은 사무관들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국장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게 되었는데, 폐점금지령을 당장 발포하여 실행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폐점이라는 반항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니까 여하튼 취체를 단행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태가 매우 중대했던 만큼 총독은 이를 국부장회의에 붙여 오랫동안 조선에서 근무하여 조선 사정에 해박한 국부장들의 의견을 타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경무국장은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개점을 강요해야 한다는 의견을 열심히 주장했지만 오랫동안 조선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를 절대로 반대하였고, 이리하여 국부장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불간섭주의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카이케 국장이 국장실로 돌아와 회의 결과 불간섭주의로 결정되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국부장회의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도대체 경찰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전혀 책임관계도 없는 국부장들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결단코 이에 승복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장 앞을 물러 나와 자진해서 정무총감에게 직접 호소했는데 그 때 나는 ‘경찰에 관한 모든 일은 일단 경찰에게 맡겨 두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경찰이 책임져야할 일을 다른 국부장에 의해 결정해야 하는 것은 불합리하니까 이를 모두 경찰관에게 맡겨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총감을 ‘다른 국부장들의 의견이 옳지 않다면 자네들이 폐점한 자들을 전부 철저히 단속 취체할 자신이 있는가? 그렇게 해서 이 일을 강행할 힘이 있는가?’하는 사실을 계속해서 질문하셨기 때문에 저는 지바 경무부장과 함께 타협하여 주동자 40여명 정도만 강제적으로 연행 취체하면 반드시 종로 전체 가게가 문을 열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무총감에게 이 일을 수행할 자신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자신이 있다면 해 보게’하고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런 연고로 어떻게 해서라도 문을 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빠지게 되었고 폐점하고 나서 간섭하는 것보다는 미리 문을 닫지 않도록 힘을 쓰고 그 영향이 미치지 못하여 폐점을 했을 때에는 강제로 간섭하여 문을 열게 하자는 식으로 지바 경찰부장과 충분히 타협을 하였지요. 지바 경찰부장은 이 일로 인해 매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 날 밤부터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지만 결국 당일이 되자 종로 거리에 있는 가게는 한 집도 문을 열지 않았고, 드디어 복안을 정해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침 일찍 경기도청에 가서 지바씨와 상담하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다해 동원해 본 결과, 결국 오전 11시경까지 모든 가게를 개점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그 때 나는 종로거리를 말을 타고 세 번 왕복했는데 최후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일단락을 지었을 때에는 한 집도 폐점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 길로 총독관저로 가서 ‘바로 모든 가게가 문을 열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각하 안심하십시오.’하고 보고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직접 경찰국에서 일을 담당했던 지바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폐점에서 개점으로

▷지바 “1919년 9월 총독이 새로 부임할 당시 경성 시내가 불온하다는 정보가 자주 우리들에게 들려 왔지만 특히 9월 29일에는 경성 시내에서 불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27일 밤 앞에서 마루야마군이 말한 것처럼 마루야마군의 관사에 우리 동지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협의했고 또한 폐점운동에 대한 대책도 궁리했습니다. 이렇듯 불안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30일을 기하여 오합지졸과 같았던 경찰관을 통제하기 위한 점검 훈련을 실시했고 소방대도 직접 연습을 시켰으며 전 경찰관의 사기를 진작시킬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29일에 시내 소요를 진압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 29일 아침 경복궁 밖에서 전 경찰관을 소집하여 마상(馬上)에서 이를 점검한 후 그 경찰관을 시내에 배치했고 또한 소방대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계획도 실행에 옮겼습니다. 더욱이 과거 기마대가 소지하는 권총은 외국인들의 눈을 생각하여 상의(上衣) 밑에 휴대했던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라 일소하고 이를 상의 위에 휴대할 수 있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시내 경계를 맡게 했습니다. 또한 경찰서장들 중에도 염려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런 반대론을 묵살하고 경찰서 내에 있는 권총을 휴대하게 한 후(무장시위) 권총부대를 조직하여 시내 경계를 맡게 했고 이들을 29일 시내 곳곳에 배치하여 순찰 경계를 하게 한 결과 예상했던 소요도 없이 무사히 끝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9시경 우메다(梅田)라는 형사가 나의 근무처에 뛰어 들어와 불온 문서를 입수한 것을 보여 주었는데, 아주 조그마한 양면궤지에 활자로 인쇄된 불온문서로 그것을 읽어 보니 10월 1일에 폐점을 결의하고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방화할 것이라는 협박의 글이 적힌 불온문서였습니다. 이 비라는 남대문 옆에 있는 어떤 상점으로부터 죽을 고생을 해서 겨우 한 장을 구할 수 있었다더군요. 이것이 바로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폐점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이전부터 들어왔으나 과연 실행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아직 입수되지 않았는데 이 한 장의 불온 문서로 그것도 활자로 인쇄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마 경성 시내에 있는 모든 상점에 배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한 장도 우리 손에 입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이 얼마나 조선 총독정치의 전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불온 문서 한 장이 입수되었기 때문에 급히 제 3부내의 간부를 소집하여 협의한 후 폐점운동에 대한 과거의 처리 방법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후 고지마(兒島) 헌병사령관을 만나 독립소요 당시에 있었던 폐점 상황에 관해서도 상세히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폐점운동이 독립소요 당시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고지마 사령관은 가게를 닫으면 상인들이 생계 문제로 곤란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폐점하도록 방치해 두면 자기들 스스로 곤란하니까 결국 가게를 열 것이라며 방치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가게를 열지 않고 그러는 중에 불온한 공기가 경성시내에 가득 찼으며 혹은 은행 환불소동이 일어나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 때에서야 허겁지겁 헌병사령관이 자동차를 타고 경성시내를 순시하며 사태를 둘러본 바 그 험악함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여서 매우 난처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개점을 강요하는 방책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군대와 경찰이 함께 가게로 가서 개점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군대나 경찰관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었지만, 모습이 사라지면 곧 문을 닫는 식으로 저항을 계속했고, 이런 상황이 전후 20일 이상이나 끌었기 때문에 골치를 썩였고, 이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고지마 사령관이 내게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3부 경찰 부원들에게 ‘왜 이를 법으로 단호하게 처벌하지 않았는가’하고 물었더니 이를 처단할 수 있는 법조문으로는 보안법 제 5조에 ‘언어 형용, 그 외의 작위로서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그 금지를 명할 수 있다.’는 조문이 있긴 하지만 이 조문을 해석하면 언어 형용, 그 외의 작위라고 되어 있으니까 부작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다는 것은 부작위에 해당되므로 5조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과거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 취급을 할 수 없었다고 간부들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나는 안녕 질서를 똑같이 문란케 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부작위라고 해서 제외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밝은 대낮에 개점하는 것이 상점의 정상적인 모습이므로 폐점은 일종의 작위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폐점운동도 제 5조를 적용하는 것에 상당하다고 해석해야 한다. 즉 이 법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경찰력을 동원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 밤중에 마루야마 사무관을 불러내서 함께 아카이케 경무국장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내 의견을 말씀드리자 모두 찬성해 주셨고 그러면 내일 정무총감에게 말씀드려 동의를 얻고 즉시 그러한 방침으로 일을 추진하고자 결정했습니다. 동이 트기 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그 날 밤을 넘기고 30일 예정대로 경찰력을 통제할 계획 하에서 다시 경복궁에 모든 경찰관을 소집하고 점검훈련을 실시한 후 또 한 번 경찰관 전부를 종로거리 일대를 거쳐 동대문까지 행군을 시켰습니다. 또 동대문에서 북한산으로 올라가 모든 경찰관에게 발포연습을 시켰습니다. 한편 소방대원 전원을 소집하여 종로에서 소방대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동대문에서 또 북한산 위에서 발포연습을 하는 총격소리를 뒤로하면서 총독부로 뛰어 올라가 전날 저녁 아카이케 경무국장과 마루야마 사무관이 협의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마루야마 사무관은 매우 격앙된 얼굴 표정으로 ‘실은 어젯밤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그러나 정무총감에게 직접 말씀을 드린바 경기도 지사가 책임을 지고 이를 실행하겠다고만 한다면 총독부는 직접 간여치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결정되었지만 경기도 지사가 일체 책임을 지고 실행한다고만 한다면 총독부는 직접 관여치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