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을 때, 간절히 소망하였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자식의 문제로 상처받았을 때, 우리는 슬픔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 상태를 겪는다. 검게 그을리고 쪼그라진 심장에 물집이 생겨가는 것이다. 슬픔은 그런 것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 대가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강한 사회’에서 “우울한 사람은 만일 그가 슬픔을 느낄 수만 있어도 크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며 슬픔보다 우울의 날카로움을 경고했다.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우울은 ‘대상의 상실’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주장처럼 사랑하는 어떤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울감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모든 슬픔이 ‘대상의 상실’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우울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을 때 우울은 수반된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감정은 규정화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아의 무거움에서 오는 패배감이 슬픔의 원인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의 경험은 그렇다. 대게의 포유류가 느끼는 슬픔에서 모두가 자유로울 순 없다. 슬픔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우리가 겪는 모든 슬픔과 우울감에 대해 납득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슬픔과 우울을 가리켜 ‘마음의 감기’라고 한다. 푹 쉬라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감기만큼 가벼운 슬픔과 우울 역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슬픔과 우울로 인한 고통을 무조건 감내해야 한다는 건조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존재가 감당해야 될 슬픔의 무게는 언제나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우울감에 지배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은 종국에는 일상으로의 회복이다.

페이스 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세릴 샌드버그가 화자로 와튼 스쿨 심리학 교수인 애덤그랜트가 제3자로 등장하는 ‘옵션 B’를 지난 주말에 읽었다. 가을이 주는 사색의 정중한 선물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내게도 동일한 슬픔의 편린들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슬픔의 극복 과정에 인간으로서 동화되었던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책은 단숨에 읽혀졌다.

지난 2015년 멕시코 휴양지 호텔에서 세릴은 남편 데이브 골드버그가 헬스장에서 쓰러져 숨지자 가슴과 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는 셰릴은 감당하기조차 두려운 슬픔과 우울감으로 초등학생인 아들딸을 홀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해한다. 성공한 워킹 맘으로서의 자신감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피폐해진다. 자상했던 남편을 잃자 그녀의 일상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데이브는 심장 부정맥으로 순식간에 숨졌지만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에 휩싸이고 고통이 일상의 모든 것을 뒤덮은 채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자신과 아이들을 챙기는 부모, 형제들에게까지 자신으로 인해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세릴은 책의 전반부 내내 계속 죄책감과 미안함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친구 애덤은 자책하지 말고, 훨씬 더 나쁜 상황을 생각해 보라고 조언한다. 매일 일기를 쓰며 작은 일이라도 감사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려 그녀는 애쓴다. 눈물이 터져 나오면 참지 말고 엉엉 울며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도 한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셰릴이 힘겨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한 걸음씩 내딛는 과정은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사회적 지위의 정점에 있을 때 자신이 쏟아냈던 말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모습에서는 그녀의 성찰과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 슬픔은 받아 들여 질 때, 인정할 때, 비로소 완화된다. 그러나 잊어지고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 무디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간혹 슬픔은 감정의 반응이므로 자신이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삭막하고 관조적이다. 동물들도 자신의 혀로 몸에 난 상처를 보듬고 핥는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돌보고 치유해야 한다. 그것은 슬픔 앞에서도 꾸역꾸역 먹는 밥이고 고단한 육신을 보듬어주는 잠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의 우울한 정서를 이해하고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공감이며 동반이다. 사람의 슬픔은 그래서 언제나 나누어져야 한다. 대립과 탐욕의 사회, 지독한 이기주의의 만연, 집단에 대한 고민보다 개인에 대한 고민이 극심해지는 슬프고도 우울해지는 사회, 상처받은 이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관계에서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고립무원의 방치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슬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치유하는 것, 그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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