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례 <수필가>

가을이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다. 뒤꼍 언덕위에 화살나무 잎이 붉게 물들고 있다. 어쩌려고 저리 붉게 타고 있는가. 저 황홀한 빛을 어쩌면 좋은가. 물들고 있는 나뭇잎을 보며 발이 동동거려진다. 이 맘 때가되면 춘천에 가고 싶다.

그때도 10월 마지막 주말이었지 싶다. 집에 부모님께는 부모님도 잘 아는 친구 미숙이 만나러 서울 간다고 빨간 거짓말을 하고 군에 가있는 그 사람을 만나러 양구로 향했다. 아침 일찍 청주에서 출발했건만 춘천 가는 버스를 탔을 때는 해가 기울어있었다. 가을해는 짧고 초행인 낮선 도시는 나를 두렵게 했다. 내 앞에 앉았던 다정한 연인들에게 양구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었다.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남자가 “지금 양구 가려고요?” 한다. 그렇다고 하니 그 사람은 지금 양구가면 군에 있는 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뿐더러 만나지 못하면 위험하다며 걱정을 했다. 춘천터미널에서 그 사람은 못미더운지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지금 양구로 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이 친구 집에서 자고 내일 첫배로 들어가요.” 한다. 옆에 있는 여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공지천에 멋진 와인카페가 있는데 자기들이랑 놀자고 한다. 그의 여자 친구도 그리하라며 나를 잡아끈다. 난 못 이기는 척 그들을 따랐다. 호수위의 카페는 아름다웠다. 그는 농대를 나왔고 여자 친구는 교육공무원이었다. 부모님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 거라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때 너무나 아름다운기억 때문에 지금도 춘천이라는 지명만으로도 아름다운 도시의 가을밤으로 각인되어있다.

자기 여자 친구에게 여자인 나를 재워주라던 그 사람이나, 생면부지의 사람을 자기 집에 들이는 여자나,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따라가는 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상황이다. 요즈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친구 부모님도, 매일 보며 사는 옆집사람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그때는 사람냄새가 나는 세상이었지 싶다. 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들었고 상처를 보았고 꿈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여자에게 고맙다는 편지 몇 통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은 그 남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는 면회를 갔던 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들을 잊고 살았다. 세월이 20년쯤 흐른 후, 어느 날 우연히 전원생활이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다. 잡지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아름다운정원을 소개하는 페이지, 그 사람은 넓은 정원 커다란 은행나무아래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의 부인은 그때 그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잡지의 글과 사진을 통해본 그는 여전히 낭만적이었다. 잡지사를 통해 그의 전화번호를 알았다. 그러나 통화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했던 사람으로, 아픈 사람으로 다 잊지 못할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늘 가슴에 따뜻함으로 남아있다. 살다가 가슴시린 날 그 따뜻함을 생각하면 위로를 받게 된다.

나에게 춘천에서 만난 연인들은 고맙고, 내 풋풋했던 그때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도 머리는 하얗고 주름진 얼굴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이 계절처럼 곱게 물들었을 것이다. 10월 마지막 주말이다.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 그들에게 와인을 곁들인 맛있는 밥 한 끼 대접 하고 싶다. 우리가 만났던 이 계절, 거기 춘천 공지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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