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해가 짧아지고, 날이 서늘해지고 있다. 하늘도 집 앞 강물도 맑아지고 있다. 가을 물빛을 닮기라도 하려는지 고단한 잠도 맑게 수량이 주는가보다. 잠이 줄어든 자리를 생각이 발 달린 짐승처럼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지. 별스럽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러지기도 하고, 한 밤이면 쓸데없이 의식만 명료해지기도 한다. 부유하던 기억들은 마음의 고샅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자리를 잡고 있는 건지 어쩐지. 한 밤중에 갈피도 모르는 생각들을 하는 줄도 모르게 몇 시간씩 좇는 일이 제법 늘고 있다. 머리맡에 꺼두었던 전화기를 켜서 공연히 시간을 보거나 신기할 것 없는 뉴스를 읽는 시늉으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베개를 고쳐 베기도 하면서 내일은 커피를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일도 낙엽 날리는 일처럼 쌓이고 있다. 서 너시간 눈을 붙인 날도 여섯시 반쯤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는 한다. 오랜 동안 아침을 챙겼던 습관의 힘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다니 신기하다. 잠이 안오기도 하다니, 자야하는 시간에 아무 생각할 거리도 없이 그저 맑게 정신이 개어오다니. 이런 게 불면이라면 이제 제법 불면 문 턱을 넘어선 셈이겠다.

날이 밝고 일과를 시작하면 커피를 줄이기는커녕 더 많이 더 간절하게 마시게 된다. 처음에는 각성을 위해, 다음에는 맛으로, 다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그리고 힘을 내려고, 그 다음에는 한요해져서, 그래서.

처음 커피를 마셨던게 언제였을까. 농촌 동네 이웃 누군가가 월남전에 다녀왔다며 할아버지께 인사하러 오면서 들고 온 것들 속에 커피가 있었지 아마. 월남전에 다녀오는 이들은 꼭 그런 신기한 먹을거리들을 가지고 인사를 왔더랬다. 그 때 깡통에 들어있던 아마도 파인애플이었을 그 과일은 아아, 어쩌면 그리도 이국적인 단맛이었던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시절, 젊던 엄마는 고쿠락에 물을 끓여 그 국방색 방수포장에 든 커피가루를 탔을까. 아니면 석유곤로라도 있었을까. 그 때 그 촌 동네, 여자들은 젓가락도 잘 사용하지 않고 숟가락 총과 손가락으로 나물을 집어먹기도 하던 시절에 커피잔 같은 게 집에 있을 리 만무했으려니. 밥 그릇이나 종지 같은데 엄마는 월남에서 가져온 전투식량이었을 그 커피를 탔을 것이다. 그 이국의 맛을 보면서 엄마는 촌을 벗어나 대처로 나가고 싶어지기도 했을까, 어쩌면. 햇살이 비스름하던 그런 시각, 마루 끝에 구경하듯 둘러서서 우리도 한 모금씩 맛을 보았다. 애들은 많이 마시면 안좋다더라, 엄마는 그러면서 또 한 모금씩을 먹게 했는지.

아버지가 외국에 다녀오면서 커피를 어마어마하게 사오셨던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눈발 날리는 날 친구가 놀러오면 양옥집이라는 장르의 새로 지은 집, 연탄 아궁이가 있고 타일이 붙어있던 부뚜막에 걸터앉아 그 커피를 타서 마셨던가. 문 밖으로는 눈이 꽃잎처럼 날리고, 아버지가 사 오신 아직 방송에도 나오지 않던 이국의 음악을 들으면 먼 나라 같은 우리 앞날이 설레기도 했는지. 대학 때는 커피를 그다지 즐기기 못했던 것 같다. 카페인에 민감해서 가슴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또 주머니가 늘 비어있는 청춘이기도 했고, 이래저래.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셨다. 건강할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투병 중에도 커피를 좋아하셨다. 커피를 드시는게 행복하다고, 훌륭한 위안거리라고. 하루에 여러 잔씩 드시면서도 그 때마다 시간처럼 아껴가며 조금씩 드셨다. 그 커피가 핏줄마다 타고 다니면서 몸 속의 체온을 높여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불청객인 암 따위들 몸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면.

꼭 한 손가락을 올리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컵을 잡으셨던지, 후루룩 소리내지 않고 마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맛나게 조금씩 그렇게.

천국에도 커피가 있을까, 그러면 아버지는 여전히 소리내 후루룩 마시는 걸 경박하다고 여기면서 천천히 아끼듯 드실까. 눈을 지그시 반쯤 감아가면서 그렇게.

가을에는 역시 이별이 없어야 겠다. 떠나는 것들, 떠나야 하는 것들이 자주 운명을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잠 안오는 시간들은 단지 커피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독 수준으로 마시고 있으니 좀 줄이기는 해야겠지만. 천국에도 커피가 있다면 아버지가 더 행복하실 것도 같다는 속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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