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순 <청주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장>

삶이 혼란스러워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궁금해질 때는 예전에 근무했던 서울시가정상담소장님을 생각한다.

청소년상담실에 있다가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가족 상담을 배울 수 있도록 가정상담소로 옮기게 해주시고 심리치료이론인 TA(교류분석)을 소개해주신 분이시다.

처음 가족사례를 들고 소장님 방에 들어갔을 때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야기 들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주말마다 모여서 TA공부를 할 때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강의를 듣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나와 반대로 소장님은 그 당시 도입초기였던 MBTI, 가족치료, TA에 관해 번역한 자료와 토론내용을 노트에 빼곡히 기록한 강의 자료를 가지고 다니셨다.

돌아가신 뒤에 댁에서 유품을 정리할 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록(노트, 녹음, 복사물)이 남아있었다.

소장님 전공은 법학이셨는데 가정상담소에서 이혼에 필요한 서류, 절차를 도와주려다 보니 상담까지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소장님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소장님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첫 번째 방법으로 그분의 별칭을 사용하였다. 집단 상담을 할 때 별칭 짓기로 자기소개 시작을 하는데 이전에는 ‘신장(키)’과 관련된 별칭에 의미를 담아 사용했었지만 소장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소장님이 사용하던 ‘바다’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제가 근무하던 상담소장님이 사용하던 별칭이 바다입니다. 바다에는 강들이 모이잖아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들을 잘 듣는 바다가 되고 싶습니다.”

집단상담 시간에 소장님이 하시던 이야기를 사용하곤 한다. 자주 그 별칭을 부르면 나와 연관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장님의 흔적이 남게 되리라 생각했다.

두 번째는 소장님의 지인과 유품을 정리하면서 공부도 하고 기념이 될 만 한 자료를 찾기로 했다. 그후 시간이 나면 정리해야지 했던 유품(노트)들은 서울에서 청주로, 여러 번 사무실을 옮기면서 누렇게 바랜 채 철제 캐비넷에 잠자게 됐다.

아직도 소장님의 유품이 잠들어 있는 캐비넷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정리 해야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주변을 정리하며 소장님을 보내야 할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삶의 혼란은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내가 하고자하는 일이 아닌데 주변 상황에 의해 억지로 밀려간다고 느낄 때, 과장된 책임감이나 설레발(?), 오지랖(?)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될 때 다가온다.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마다 옆에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소장님이 그립다.

페이스북(facebook)에 소장님에 대한 그리움을 짧게 표현한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내 글을 보고 TA공부를 같이 했던 한 지인은 이렇게 소장님을 회상했다.

“‘박현순 선생, 당신이 하고 싶은 게 뭐요?’ 이렇게 소장님은 항상 기본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귀 기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립네요. ‘박선생’하고 불러주시던 힘 있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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