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나를 비롯하여 오십 대의 중년은 현대사의 비좁은 갈림길에서 속절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던 세대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틈새에서 사회적 성장통을 치러 내느라 부단했고, 부모님은 전쟁도 가난도 겪지 않은 그 많던 자식들을 생계의 언저리에서 대수롭지 않게 키워내셨다. 우린 그렇게 아날로그 자생의 시대를 자연과 벗들과 어울려 보냈다. 소비를 통한 과한 돌봄에 익숙한 지금 부모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방목의 자식 교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슬며시 돌아보니 특별할 것 없었던 우리들의 유목적 놀이문화는 훗날 내성과 관계의 진정성을 키워준 참 좋은 교육이었다.

청년세대는 ‘헬조선’이라는 말을 이해 못할 거라며 오십 대의 우리를 평생직장이 있던 호시절의 수혜자로 취급한다.

자식세대이기도 한 그들에게 유연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득권을 쥔 꼬장꼬장한 어른으로 취급받고, 노년의 어른들에겐 아직 젊디젊은 청춘으로 인식되는 낀 세대라 생각하니 고립감에 왠지 울컥하는 마음도 든다. 그렇게 우리 세대는 부지불식간에 세대의 양쪽에서 치이는 주변인이 되어버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식의 안위를 위해 그저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중년이라는 생경한 이름으로 존재는 규정당하고 아직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것도 아닌데 해결해야 할 일들은 산적하다. 마음 같지 않은 몸의 변화부터, 노년이 되기 전에 뭔가를 갖추고 완성시켜야 한다는 안팎의 강요까지 육신은 혼미하다. 욕망에 압도당해 풍요로움을 갈망했고, 삶의 너른 가치보다 속물적인 대상에 집착했던 지난 시기였기에 오십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영혼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노년 세대의 나라 걱정과 젊은 세대의 사회 불신 사이에서 혼절하지 않고, 벗들과 함께 했던 연대의 오롯한 기억과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가 우리라 믿고 싶다. 사회 안에서 존재감을 찾고자 하는 억지 위로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객기를 부리자면 오십 대의 중년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질 권리’를 포기하긴 싫다. 중년은 인생이라는 두꺼운 책 말미, 노년의 챕터 앞 페이지에 살짝 끼워진 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주는 무거움에 구속되지 않고 청년처럼 조급하지 않게, 노년처럼 마음과 몸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게 살 수 있는 나이가 지금 아니던가. 먹고사니즘에 천착하며 부질없는 출세를 위해 너무도 서슬 퍼렇게 혹은 서늘하게 치열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이제 어떤 목표에 안달하기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긴 호흡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시기가 지금의 나이라 스스로에게 다독여주고 싶다. 아직 고단한 짐을 채 내려놓지 못하는 벗들도 그리 믿어 가시라. 그리 위로받으시라.

급격히 흐릿해진 시력만큼이나, 일상화된 피로의 관성만큼이나, 중년의 시절이 고단하고 무거워도 우리 모두, 육체적 나이에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치열하게 살아온 청춘의 편린들 속에 상처받은 자신을 위해 때로는 게으름과 실수에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죽음에서 병환에서 누구도 예외는 없다.

기억과 체력은 저하되지만 세상과 관계를 관조하는 이해력은 높아져 가는 것이 오십 대의 미학 아니던가. 지난 청년의 시간들이 내 취향을 알아가는 데 필요한 시간들이었다면 중년에 스며든 심리적 변이와 사회적 왜곡들을 털어놓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치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삶이 더더욱 필요하다.

미약한 나의 자아를 덧칠하기 위한 부질없는 소유의 덫에서 벗어나 필요 없는 물건을 선택하지 않을 지혜를 발휘하며 ‘비워낼 줄 아는’ 삶을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십 대의 시간을 살아내는 최소한의 태도 아니겠는가. 고백컨대 타인의 시선에서 단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내면에서 멀어져 왜곡되고 변질된 모습으로 나의 삶은 기형화되었다. 사회적 기준에 턱없이 부족한 자신의 결점과 마주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제 그 해방감을 누리자고 오십 대의 벗들에게 제안한다.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불러 삼십 대를 위로했고 양희은은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불러 사십 대를 위로했지만 오십 대를 위로하는 노래는 없다. 그저 내 스스로가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존재의 무거움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랜 친구 형원과의 술잔에서 확인하고 살포시 기대어보는 수밖에. 오십 대, 나를 위한 위로의 노래는 그렇게 자작 될 것이다. 벗들이여, 부디 이 가을, 가슴으로 채색되는 오색단풍을 반주 삼아 오십 대를 노래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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