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전능한 신의 보호가 약속된 중세의 국가관으로부터 불완전한 인간중심의 근대를 향해 역사가 힘겨운 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인권에 대한 자연법적 지위를 인정함에서 비롯되었다. 국가가 국민보다 선행한다는 국가선재론(國家先在論)은 국가로 하여금 국민적 지위를 사람에게 수여할 수 있게 했었다. 신을 향해서는 의무이고 국민을 향해서는 권리로 개념화된 정치권력은 선천적으로 신의 대리인이란 자격을 가진 ‘왕’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근대는 왕이나 제후가 아닌 지위를 가진 사람도 경영이란 새로운 지배개념을 통해 지배층에 편입될 수 있으며,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신분이란 선천적 조건이 필요치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경험하게 해 주었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땅에 속박된 농노라는 신분의 속성에 따라 땅 주인에게 유보되어야한다는 생각으로부터 공장주와의 계약관계의 자유로운 설정을 위해 필요한 노동자의 권리로 재정립되었다. 헨리 메인(Henry Maine)에 의해 ‘신분에서 계약으로’란 말로 표현된 인간의 사회적 지위는 천부인권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국가 이전의 인간의 상태는 홉즈(T. Hobbes)에 의해 ‘자연상태(State of Nature)’로 명명되었으며 이 때 필요한 질서는 그로티우스(Grotius)로부터 ‘자연법’이란 이름을 얻었다. 자연법의 적용을 받으며 천부인권을 누리던 인간이 국가란 조직을 스스로 만든 것은 바로 자연상태에서 누리던 자유가 인격을 구현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머무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사회계약’을 통해서 인간이 결국 국가를 탄생시킨 이유는 바사실에 기인한다. 국가이전의 자연상태에서 이미 자유를 누렸던 인간들이 계약을 통해 국가를 조직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한 이유는 이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자유를 확보해야 결국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은 온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에 의해 보장된 자유와 일반의지에 의해 성립된 국가의 일원 즉 시민으로써 보장받는 자유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먼저 자연상태에서의 자유는 그러한 상태를 누릴 수 있는 다른 동물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지 못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등의 자유는 국가의 성립이전에도 누릴 수 있는 생래적 자유다. 길을 건너고 싶을 때 건널 수 있는 자유는 국가사회라는 단체가 성립되면 오히려 제한된다. 왜 사람들은 아무 때나 길을 건널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의 의지로 제한하고 신호등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제약을 선택했을까? 기꺼이 자신의 자연적 권리를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역사는 ‘시민’이란 지위와 ‘시민적 자유’를 부여했다. 아무 때나 먹고 자는 자유를 누림으로써 건강을 해하는 것보다, 그럴 수 없는 제약이 건강을 유지할 경우 후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조건이 된다. 자연상태의 자유에 제약을 가함으로 시민적 자유를 얻는 것이 진정한 인격적 행위임을 깨닫는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근대’였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항해이다. 자유추구의 개념은 양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과 함께 질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포함함으로써 정립된다. 이는 정신적 자유권을 신체적 자유를 얻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헌법에 위치하게 했다. 신체적 자유는 정신적 자유의 범위 내에서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적 자유를 자유의 본 모습으로 본다. 그리고 신체적 자유는 정신적 자유에 그 개념을 유보시켰을 때 국가가 보호해야한 천부인권으로의 모습을 갖는다. 자유는 힘이 세다고 해서 남을 함부로 괴롭히는 사람의 행위에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

교육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인식하여 이를 쟁취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은 방종적 자유의 제한의 결과로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고 시민적 자유의 수호자로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인류역사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국민을 양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주었기 때문이며, 이를 인식하지 못한 국가는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임을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개혁은 이를 깨달음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