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네 나이 지금 몇이냐?” “마흔 둘입니다. 근데 아버지, 새삼스레 제 나이는 왜 물어요?” “너 서른에 지금 딸애를 낳지?” “그랬지요. 그 미혜가 지금 열 두 살이잖아요. 근데요?” “서른이면 논어에 ‘이립(而立)’이라 해서 인생관이 설 나이라고 했다. 그때 딸 하나만 낳고 고만 둘 생각이었느냐?”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의 네 인생관이 딸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이었냐 말이다.” “건 갑자기 왜 물으셔요?” “그렇지 않고서야 시방 네 나이 마흔 두 살이 되도록 십이 년 동안이나 둘째 애를 가지지 않고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간 이제나저제나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만 아직도 이니 말이다. 혹 니 둘 중 하나가 이상이 생긴 게냐 아니믄 니 내외 약속이라도 했느냐?” “아, 예, 전 또 무슨 말씀이라고요.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만 낳고 그만 낳기로 했어요.” “니 생각이냐 니 댁의 생각이냐?” “둘 다의 생각이에요.” “아니다 넌 그럴 리 없다. 넌 우리 집 처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 니가 그렇게 하자구 했을 리 만무야. 니 댁 좀 들어오라구 해라!” “왜요?” “왜는 무슨 왜. 시애비가 며늘애 좀 보자는 게 뭐 잘못이냐?” “아버지, 오늘 왜 이러셔요?” “오늘 왜 이래? 그래 오늘을 별렀다. 잔말 말고 얼른 들어오라구 해!” 아들은 머리를 외로 틀어 보이곤 방을 나가면서 소리 지른다. “여보 아버지가 부르셔 빨리 와봐!” 며느리가 뿌르르 달려와 방문을 연다. “아버님, 부르셨어요?” “오, 그래, 앉어라. 빙빙 돌리지 않고 직바로 묻겠다. 그래 누가 먼저 하나만 낳고 그만 두자고 했느냐?” “예? 무슨 말씀인지…?” “니들 둘 중에 누가 먼저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만 낳자고 했냐고?” “그야 둘이 합의해서….” “그래도 누가 먼저 말 꺼내놓은 사람이 있을 것 아냐. 에미 너냐?” “아녜요 전 웨래 처음엔 ‘당신 외아들인데 아들은 하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고 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애비가 ‘어차피 딸두 같은 핏줄인데 뭘 구분하냐’구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만 낳자구 했어요.” “그려? 그럼 애비가 먼저 그랬단 말이지?” “들어보셔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생각이라면 고맙다’구 사실은 나두 같은 생각이라구 했지요. 그러니 애비나 저나 같지요 뭐.” “핏줄은 같다고 하지만 씨는 아들이 아니냐?” “씨라는 것은 곡식이나 과일에나 있는 것이지 사람은 다르잖아요.” “달러? 어떻게?” “씨는 씨에다 심는 게 아니라 밭에다 심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같은 사람에 심는 거잖아요?” “남자가 여자에게 심는 거지?” “남자나 여자나 다 사람이잖아요. 그치만 씨와 밭은 엄연히 다르지요. 안 그래요 아버님?” “가만있자 그러니까 니 말은 씨는 씨고 밭은 밭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다 같은 사람이니까 아들과 딸도 다 같다 이거로구나?” “아버님 참 멋지시다 그 연세에 다 알아들으시는 거 보면.” “얘 놀리지 마라. 그리구 애비 좀 이리 들어오라구 해라.” 시아버진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면서 이른다. 그러자 며느리가 뿌르르 나가고 곧 내외가 같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는다. “편히 들 앉아라. 내 방금 에미 말을 들으니 그럴 것도 같다만 아무래도 헷갈린다. 그건 그렇고 애비 너 마흔 둘이라고 했지?” “예” “마흔이면 논어에서 ‘불혹지년(不惑之年)’ 즉 ‘불혹(不惑)’이라고 해서, ‘부질없이 망설이거나 무엇에 마음이 홀리거나 하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지금 아무리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하나만 낳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너희 둘 마음만 다잡는다면 에미 아직 삼십대이고 낳던 자리이니까 애기 가질 수 있을 게다. 사내놈 하나는 있어야지. 그래야 니 할아버지께서 늘 나한테 부탁하던 ‘계계승승(繼繼承承)’이라는 것도 지킬 수 있고 말이다.” “‘계계승승’요?” “자자손손이 대를 이어가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 선대에서 하던 일을 후대 사람이 내리 이어받는 것이지. 너까지 근근이 이어오던 대를 니 대에서 끊겨서야 되겠느냐. 선대에 죄를 짓는 일이지. 그러니 그리 하도록 해라!” “아버님, 아까 제 말씀 이해하셨잖아요. 딸이나 아들이나 같다고요.” “아버지, 그러니 아버지께서 양보해 주셔요. 예!”

완강한 자식내외 앞에서 시아버진 결국 해결을 못 보고 또래 마을노인장들이 앉아 있는 마을 정자로 나왔다. “마뜩찮아 하는 표정 보니께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으이. 보나마나 자네 성미에 계계승승이 소원이라 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명령조로 얘기했구먼. 그러면 안 되네. 난 그게 소원이라고 하면서 빌어 받치는 흉내까지 냈다고. 그래 그랬던지 간신히 늦둥이 손자 하나 봤다니께.” 그러자 옆 노인장이 툭 내뱉는다. “성인도 종시속(從時俗)이라 했네. 하물며 성인군자도 아닌 우리 민초들이 현 시속대로 따를 수밖에. 안 그런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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