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렬 <수필가·시낭송가>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 때면 나는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가 생각난다.

‘똑딱똑딱’하며 울리는 다듬이 소리와 함께 시골집에서 어머니와 지내던 유년시절, 눈 내리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도 시골집 사랑방에서는 어머니가 불이 꺼지려는 질화로에 연방 삼발이를 올려놓고 오지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며 나를 기다리실 것만 같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의 겨울밤은 추운 줄을 몰랐다.

어디 우리만 눈 내리는 겨울밤을 좋아했던가. 사냥꾼들은 사냥을 갈 수 있어 눈을 기다렸고, 농사꾼들은 보리를 위해 함박눈이 내리길 고대했다.

초가집 처마에 팔뚝만 한 고드름이 달리면 펄쩍 깨금발로 뛰어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행여 고드름 안에 지푸라기 한 줄이 박혀 있어도 그 안엔 따스한 정이 담겨 있어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서를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뒤뜰에 놓인 열댓 개의 장독대엔 홍시가 가득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 장독을 찾아내는 즐거움은 또 어떠했던가.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장작불을 잔뜩 지핀 아랫목은 설설 끓었다.

그때 대접에 얼음이 서걱서걱한 홍시를 담아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 전 감을 사서 냉동실에 얼렸다가 녹여 홍시를 만들어 먹은 일이 있었다. 치아만 시릴 뿐 더욱더 어머니 생각만 간절해졌다.

그때의 추위에 비한다면 지금은 추위라 할 수도 없다. 학교에 오고 갈 때면 정말 발가락이 빠지는 듯했다.

길을 가며 얘기를 할 때마다 입에서는 입김이 나왔고 목에 감은 목도리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장작바리를 싣고 들어오는 소의 입에서도 여물을 끓이는 가마에서처럼 무럭무럭 김이 났다. 소의 턱주가리에는 으레 얼음이 달려있었다.

춥다 춥다 해도 근래에 와서는 한결 덜 추워진 것만 같다. 인총(人叢)이 많아진 탓인가, 난방장치들이 전에 비해 잘 되어 있는 까닭인가. 이유야 어찌 됐든 예전보다 지금의 겨울은 한결 따뜻하다.

창 밖 눈 날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풍요로워 진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방문을 받듯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눈은 이 땅 위에 흩어진 보기 싫은 모든 것들, 추한 물건들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어지럽고 미운 것들까지고 곱게 덮어 준다.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내릴 눈을 생각하며 나는 고단한 나그네처럼 내 집 초인종을 누른다.

적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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